“네가 찾아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결국 손가락 다 자른 이 남자의 진심은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3. 1. 14:15
[씨네프레소-114]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왜 인간관계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끊어지는지를 사유하는 소설이다. 가족보다도 더 친한 네 명의 친구에게 절교 선언을 들은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한동안 죽을 생각만 한다. 시간이 지나 자살 충동은 옅어졌지만, 세상에서 그가 차지하는 존재감도 희미해진다.
마치 세상에서 그가 있는 자리만 아무 색이 없는 듯하다. 서른여섯 살이 된 다자키 쓰쿠루는 자기가 절교당한 이유를 알기 위한 순례를 떠나고, 거기서 알게 된다. 헤어진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자기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어떻게 해도 그 관계는 다시 접붙일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는 친구들과의 추억을 보다 온전한 형태로 간직할 수 있게 된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2022)를 보며 이 소설이 떠오른 건 두 창작자가 같은 데서 고민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헤어지면 못 살 듯 친밀하다가도, 바로 다음날 별 이유도 없이 돌아서 버린다. 우리가 결별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실제로는 어느 순간 멀어지는 게 인간관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친구의 절교선언 “날 찾아오면 손가락을 자르겠어”
이야기는 아일랜드 섬마을 이니셰린에 사는 파우릭(콜린 파렐)이 어느 날 콜름(브렌단 글리슨)에게서 절교하자는 말을 들으며 시작된다. 파우릭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여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자기가 뭘 실수한 게 있는지 물어보자 콜름은 짧게 답변한다. “말실수한 거 없어.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파우릭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찾아오지 말라는데도 뻔질나게 찾아오는 친구에게 콜름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어느 순간 인생의 유한성을 절감하게 됐고, 더는 술이나 마시며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는 좋은 곡을 많이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파우릭에게 콜름은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앞으로 귀찮게 할 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자네에게 줄 거야.”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건 허풍이 아니었다
영화는 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비극이 생길 수 있다는 경고다. 우리가 친구 말의 행간도 읽어야 하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속내도 떠올려봐야지만, 때로는 표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파우릭은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사태를 키운다. 사실 그런 추측이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닌데, 음악을 우선시하며 살겠다고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기 손가락을 절단하겠다는 말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름은 끝내 자기 손가락을 잘라 친구의 집에 던지며 친구의 기대를 깬다. 일반적이라면 ‘이쯤에서 관둬야지’라고 마음먹겠지만, 파우릭은 그런 극단적 행위에도 뭔가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 추측하는 인물이다. 콜름은 결국 왼손의 손가락 전부를 잘라 자기가 얼마나 절교에 간절한지를 표현한다.
파우릭의 여동생은 오빠를 따뜻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따뜻하게 내미는 손길도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콜름이 그토록 괴롭다고 호소하는데도 계속 찾아가는 파우릭을 보며 두 사람의 역사를 추측해볼 수 있다. 아마 콜름이 질려버린 지점은 파우릭의 그 일방적인 다정함인지도 모른다.
관계의 수명이 다했음을 받아들이는 용기
사실 인간은 본인 진심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도 많다. 누군가를 보며 양면적 감정이 생길 때, 어느 쪽이 자기 진짜 마음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남의 말을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도 정확히 모르는 속마음을 남이 더 잘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파우릭을 바라보는 콜름의 마음은 호감과 불쾌감 사이를 오갔지만, 결국 콜름은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해석했고, 절교를 요구했다. 적어도 친구의 첫 번째 손가락을 집어 들게 됐을 때, 이를 인정했다면 끔찍한 결말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엔 끝이 있다. 인간관계는 여기서 예외라고 믿는 건 어쩌면 인간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 온기를 남긴 사람에게서 내팽개쳐졌을 때, 그저 관계의 수명이 다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굳이 둘 사이의 좋은 추억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가 없었다면 무한한 공허 속에서 헤맸을지 모를 인생에 의미를 남겨준 관계에 감사할 수 있다면, 서로 더 좋은 출발을 위해 축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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