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하면서 여자 불러 술판…“힘든 일 하니깐” 봐줬다는 조선시대 [서울지리지]
한양은 조선 왕조의 수도이자 정치와 행정이 집중된 곳이었다. 조선은 한양천도(1394년 10월 25일)와 거의 동시에 도성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중심부에 경복궁을 설치하고 <주례(周禮)>에서 제시한 ‘좌조우사(左祖右社)’를 받아들여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뒀다. 이어, ‘면조(面朝)’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전면에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 등 행정의 핵심이 되는 여섯 관서, 즉 육조(六曹)를 배열했다. 육조관서가 마주한 거리는 ‘육조거리’ 또는 ‘육조대로’로 불리며 조선시대 정치와 행정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로 자리잡았다.
조선왕조와 한양도성의 설계자 정도전(1342~1398)은 경복궁 앞에 포진한 육조관서의 모습을 ‘열서성공(列署星拱)’으로 묘사했다. 그 광경이 마치 별들(신하)이 북두칠성(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1398년(태조 7) 4월 26일 태조가 새로운 도읍지의 여덟 개 풍경을 담은 병풍을 제작해 반포하자 정도전이 팔경시를 지어 바쳤다. 그중 세 번째가 열서성공이다.
육조거리는 한양창건 당시부터 궁궐과 관서를 연결하는 넓은 도로로 기획됐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도로규격을 정했다. 도로는 크기와 위상에 따라 대로 56척(17m, 1척=0.30303m), 중로 16척(5m), 소로 11척(3m)로 구분됐다. 육조거리는 대로에 해당했지만 실제 폭은 법제의 규정보다 3배 이상 넓은 60m에 달했다. 한개 차선의 폭을 3m라고 가정할때 편도만 10차로의 초대형 도로이다.
의정부를 포함해 육조 관청들은 육조거리를 향해 서로 문을 두고 마주한 구조였다. 관청의 위상에 따라 동쪽(임금의 위치에서 볼 때 좌측)에서부터 배치했다. 세종대 정비된 관청배치를 반영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쪽에 의정부-이조-한성부(수도 관할)-호조, 서쪽은 예조-중추부(자문기구)-사헌부(관원 감찰)-병조-형조-공조 순으로 기술돼 있다.
이조는 육조 중 수석관청으로 ‘천관(天官)’으로 불렸다. 문관의 선발, 관원들의 근무성적 평가, 공훈에 따른 작위 부여를 관장했다. 이조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정랑과 좌랑은 인사실무를 담당해 전랑(銓郞)으로 별칭됐다. 이조전랑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사정기관)의 관리를 추천·선발하는 실권을 쥐고 있어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당파간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 호조 역시 세금과 나라의 재정을 총괄해 서열이 높았으며 돈을 만지다 보니 호조 관원들은 늘 금전적 유혹에 노출됐다. 호조의 정자 명칭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의 불염정(不染停)으로 지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예악과 외교, 교육, 과거를 담당했던 예조는 의정부 맞은 편에 나란히 둬 권위를 부여했다. 육조관서들은 대체로 업무량이 많았지만, 예조는 일이 별로 없었고 관원들의 근무태도도 불량해 음악을 검열한다는 핑계로 근무시간에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기까지 했다.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는 “예조가 육조 가운데서도 조용하고 한가해 일이 없으면서도 좋은 일은 가장 많았다. 출근하는 날에는 음악을 살핀다는 핑계로 남쪽 누각 위에 앉아 예쁜 기생과 좋은 음악을 마음껏 골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어댔다”고 전했다.
연못과 정자는 업무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다. 홍귀달의 <허백정집>은 의정부의 연못 광경을 읊으면서 “업무를 파하고(自署事罷), 공무가 적어지면(府庭公事少), 사인(의정부 정4품 벼슬)들이 그속에서 연회를 열고 음악을 연주하며(舍人尊俎管絃於其中), 빈객들과 더불어 즐기니 태평성대로세(以娛賓客而樂太平)”라고 했다.
육조의 연못 중에서는 역시 예조의 것이 명승지로 각광받았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조성하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졌다.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화재를 대비한 소방시설로 연못을 확충하기도 했다. 대량의 물을 저장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한번에 퍼 나를 수도 있어서였다.
육조의 인원은 고위직에 속하는 당상관과 실무자인 낭관(郎官)으로 구성됐다. 육조의 운영에서 중대사는 판서(정2품·장관), 참판(종2품·차관), 참의(정3품·차관보) 등 당상관이, 일상 사무는 소속관청을 주관하는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이 중심이 돼 처리했다. 육조 문관의 교체 빈도가 잦아 행정실무는 거의 서리들 몫이었다. 서리는 사무에 대한 기록을 맡거나 문서와 장부 등을 관리하는 행정업무의 말단을 담당한 직위였다. 신분이 낮고 경제적 처우가 불안정해 대부분 중인으로 채워졌다. 실무이해를 토대로 자행된 서리의 부정과 수탈은 조선시대 내내 골치 아픈 문제가 됐다.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철저히 파괴됐다. 경복궁은 공역의 부담, 풍수적 이유 등으로 중건되지 못한 채 이후 27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육조거리의 관청들은 광해군대 애초의 자리에서 복구된 이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제 위치를 지켰다.
육조거리는 조선후기 광장으로서 역할이 더욱 컸다. 도성 내 광활한 장소가 많지 않던 상황에서 넓은 공간의 육조거리는 다양한 행사에 유리했다. 육조거리의 주요 관서들은 국장이나 가례 등 국가 의례 행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적극 활용됐다. 도성의 중앙에 위치해 각 궁궐과의 연결이 용이했고 물산이 모이는 운종가와도 가깝다는 지리점 잇점이 작용했다.
육조거리는 과거시험장으로도 널리 애용됐다. 본래 문과는 예조에서 시행했지만 응시인원이 많을 때에는 과거시험장을 육조거리로 확장했다. <일성록> 1800년(정조 24) 3월 21일 기사에 따르면, 예조는 과장(科場)을 예조와 중추부를 포함해 북쪽으로는 광화문, 남쪽으로는 한성부 앞길까지 각각 장막을 둘러 설치해 3만2590명이 들어가는 공간을 마련했다.
# 도시는 멈춘 듯이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에서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의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한양의 중심,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2020
2. 육조거리, 한양의 상징대로. 서울역사박물관. 2021
3.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경국대전. 삼봉집(정도전). 허백정집(홍귀달). 용재총화(성현). 송와잡설(이기). 기재잡기(박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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