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하면서 여자 불러 술판…“힘든 일 하니깐” 봐줬다는 조선시대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3. 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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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거리, 600년간 조선의 정신을 지탱하다
확장공사 중인 세종대로(1966년 7월 4일 촬영). 육조거리는 경복궁 전면에 핵심 행정관서를 배열함으로써 치국의 근간을 마련해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유교적 통치 이념이 반영된 공간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이달에 대묘(大廟·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 문(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최고 행정기관), 삼군부(三軍府·최고 군사기관), 육조(六曹), 사헌부(司憲府·감찰기관) 등의 각사(各司) 공청(公廳)이 벌여 있었다.”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음력(이하 음력) 9월 29일 기사

한양은 조선 왕조의 수도이자 정치와 행정이 집중된 곳이었다. 조선은 한양천도(1394년 10월 25일)와 거의 동시에 도성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중심부에 경복궁을 설치하고 <주례(周禮)>에서 제시한 ‘좌조우사(左祖右社)’를 받아들여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뒀다. 이어, ‘면조(面朝)’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전면에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 등 행정의 핵심이 되는 여섯 관서, 즉 육조(六曹)를 배열했다. 육조관서가 마주한 거리는 ‘육조거리’ 또는 ‘육조대로’로 불리며 조선시대 정치와 행정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로 자리잡았다.

조선왕조와 한양도성의 설계자 정도전(1342~1398)은 경복궁 앞에 포진한 육조관서의 모습을 ‘열서성공(列署星拱)’으로 묘사했다. 그 광경이 마치 별들(신하)이 북두칠성(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1398년(태조 7) 4월 26일 태조가 새로운 도읍지의 여덟 개 풍경을 담은 병풍을 제작해 반포하자 정도전이 팔경시를 지어 바쳤다. 그중 세 번째가 열서성공이다.

도성도(일부·조선말기). 육조거리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숲이 그려진 곳은 경복궁이다. 파란색 원 내의 기관이 육조거리 관청들이다. 오른쪽은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 왼쪽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의 순이다. 지도에서는 왼쪽 맨위의 예조가 빠져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청들 우뚝하게 서로 마주서 있으니(列署岧嶤相向), 마치 별들이 북두칠성을 향하여 읍하는 듯(有如星拱北辰). 달 밝아 관청거리 물처럼 깨끗하매(月曉官街如水), 수레 옥장식에 티끌 하나 일지 않는구나(鳴珂不動纖塵)” -정도전의 <삼봉집> 中 ‘신도팔경(新都八景)의 시를 올리다’
육조거리 폭 최대 60m···오늘날 편도 10차선의 초대형 도로에 해당
1485년(성종 16) 편찬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은 중앙의 경관서는 84개였다. 84개 경관서 중 육조거리에 포진한 곳은 의정부, 중추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한성부, 사헌부, 사역원(통번역 관청) 등 11개가 확인된다. 이후 비변사(임진왜란 이후 최고 의결기관)가 추가됐다가 창덕궁으로 이전했으며 기로소(원로문신 예우 기관)가 더해지기도 했다. 육조의 서열은 태종 재위 당시 ‘이-병-호-형-예-공’의 순이었으나, 세종 때 ‘이-호-예-병-형-공’의 순으로 정리됐다.

육조거리는 한양창건 당시부터 궁궐과 관서를 연결하는 넓은 도로로 기획됐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도로규격을 정했다. 도로는 크기와 위상에 따라 대로 56척(17m, 1척=0.30303m), 중로 16척(5m), 소로 11척(3m)로 구분됐다. 육조거리는 대로에 해당했지만 실제 폭은 법제의 규정보다 3배 이상 넓은 60m에 달했다. 한개 차선의 폭을 3m라고 가정할때 편도만 10차로의 초대형 도로이다.

의정부를 포함해 육조 관청들은 육조거리를 향해 서로 문을 두고 마주한 구조였다. 관청의 위상에 따라 동쪽(임금의 위치에서 볼 때 좌측)에서부터 배치했다. 세종대 정비된 관청배치를 반영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쪽에 의정부-이조-한성부(수도 관할)-호조, 서쪽은 예조-중추부(자문기구)-사헌부(관원 감찰)-병조-형조-공조 순으로 기술돼 있다.

이조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성부는 미국대사관, 예조는 정부서울청사 앞마당에 위치
이들 기관의 현재 위치를 살펴보면, 우선 의정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북편 광화문시민열린마당에 있었다. 의정부에 이어, 육조거리 동쪽은 이조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성부는 미국대사관, 호조는 KT빌딩, 기로소는 교보문고에 각각 자리했다. 육조거리 서쪽은 예조와 중추부가 정부서울청사 본관 앞마당, 사헌부와 병조는 외교부청사 앞쪽 세종로공원, 형조와 병조는 세종문화회관, 공조는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 각각 위치했다.
의정부 터 발굴조사 모습. 의정부 터 발굴조사는 2016년 7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진행됐다. 의정부 터는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청이 자리했고 1970년대에는 치안본부 청사로 활용됐다. 1997년에는 광화문시민열린마당이 들어서면서 대형버스주차장 등으로 사용됐다. 2020년 9월 24일 사적 제558호로 지정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의정부는 전체 관원을 통솔하고 정사를 총괄하던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의정부는 도당(都堂), 묘당(廟堂), 정부(政府), 황각(黃閣·대신의 집무실)으로도 불렸다. 조선전기 문신 홍귀달(1438~1504)의 <허백정집> 중 ‘사인사연정기(舍人司蓮亭記)’는 “육조의 많은 관청 중 으뜸이 의정부(閣于六曹庶府之上), 유독 우뚝하여 높고 크니(而獨巍然高大者), 정부라 하네(曰政府)”라고 했다.

이조는 육조 중 수석관청으로 ‘천관(天官)’으로 불렸다. 문관의 선발, 관원들의 근무성적 평가, 공훈에 따른 작위 부여를 관장했다. 이조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정랑과 좌랑은 인사실무를 담당해 전랑(銓郞)으로 별칭됐다. 이조전랑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사정기관)의 관리를 추천·선발하는 실권을 쥐고 있어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당파간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 호조 역시 세금과 나라의 재정을 총괄해 서열이 높았으며 돈을 만지다 보니 호조 관원들은 늘 금전적 유혹에 노출됐다. 호조의 정자 명칭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의 불염정(不染停)으로 지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예악과 외교, 교육, 과거를 담당했던 예조는 의정부 맞은 편에 나란히 둬 권위를 부여했다. 육조관서들은 대체로 업무량이 많았지만, 예조는 일이 별로 없었고 관원들의 근무태도도 불량해 음악을 검열한다는 핑계로 근무시간에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기까지 했다.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는 “예조가 육조 가운데서도 조용하고 한가해 일이 없으면서도 좋은 일은 가장 많았다. 출근하는 날에는 음악을 살핀다는 핑계로 남쪽 누각 위에 앉아 예쁜 기생과 좋은 음악을 마음껏 골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어댔다”고 전했다.

관청별로 별도의 연못, 정자 지어 휴식···인왕산 조망되는 예조 연못 명승지로 유명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의정부 정자(일제강점기).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 내의 연못에 있던 정자로 1925년 장충단공원으로 이전됐다. 조선전기 문신 홍귀달은 의정부 관아의 건물이 가장 크고 우뚝하다고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각 관청의 내부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뉜다. 진입 영역인 대문은 솟을삼문(지붕과 문이 3개이며 중앙의 지붕을 한 단계 높게 세운 대문) 형태로 육조거리 방향으로 나 있었다. 중문 안에 들어서면 업무공간인 당상대청(堂上大廳·당상관이 근무하던 건물)과 아방(兒房·관원들의 휴식 및 대기장소) 등이 배치됐다. 세 번째 영역은 휴식과 접객의 영역으로 정자와 연못이 갖춰졌다.

연못과 정자는 업무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다. 홍귀달의 <허백정집>은 의정부의 연못 광경을 읊으면서 “업무를 파하고(自署事罷), 공무가 적어지면(府庭公事少), 사인(의정부 정4품 벼슬)들이 그속에서 연회를 열고 음악을 연주하며(舍人尊俎管絃於其中), 빈객들과 더불어 즐기니 태평성대로세(以娛賓客而樂太平)”라고 했다.

육조의 연못 중에서는 역시 예조의 것이 명승지로 각광받았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조성하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졌다.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화재를 대비한 소방시설로 연못을 확충하기도 했다. 대량의 물을 저장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한번에 퍼 나를 수도 있어서였다.

육조의 인원은 고위직에 속하는 당상관과 실무자인 낭관(郎官)으로 구성됐다. 육조의 운영에서 중대사는 판서(정2품·장관), 참판(종2품·차관), 참의(정3품·차관보) 등 당상관이, 일상 사무는 소속관청을 주관하는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이 중심이 돼 처리했다. 육조 문관의 교체 빈도가 잦아 행정실무는 거의 서리들 몫이었다. 서리는 사무에 대한 기록을 맡거나 문서와 장부 등을 관리하는 행정업무의 말단을 담당한 직위였다. 신분이 낮고 경제적 처우가 불안정해 대부분 중인으로 채워졌다. 실무이해를 토대로 자행된 서리의 부정과 수탈은 조선시대 내내 골치 아픈 문제가 됐다.

육조관원들 격무에 시달려···근무 중 음주행위 등 일탈도 묵인
풍속화(일보·조선시대) 술마시고 행패부리는 모습. 조선시대 육조 관아의 낭관(하급 문관)들은 격무에 시달렸다. 이로인해 근무 중 술마시는 것 정도는 쉽게 용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육조관원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리들은 묘시(卯時·오전 6시 전후)에 출근해 유시(酉時·오후 6시 전후)에 퇴근하는 ‘묘사유파(卯仕酉罷)’규칙이 적용됐다. 지금과 비교해 출근시간은 조금 빠르고 퇴근시간은 비슷하다. 퇴근 후에는 바로 집으로 가기도 했겠지만 술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숙직을 하면서 기생들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에 실려있다. “조종조(祖宗朝·선왕때) 육조에 숙직하는 낭관(정랑, 좌랑)들은 달밤에 창기들과 어울려 광화문 밖 한편에 모여서는 시와 술과 노래와 고성으로 밤새 이야기하고 마셔댔으니 이것은 태평시태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사간원)의 관원도 사사로운 연회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육조 낭관들이 격무에 시달려 근무 중 음주 등 일탈행위도 어느정도까지는 묵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철저히 파괴됐다. 경복궁은 공역의 부담, 풍수적 이유 등으로 중건되지 못한 채 이후 27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육조거리의 관청들은 광해군대 애초의 자리에서 복구된 이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제 위치를 지켰다.

조선후기 왕실장례, 가례, 과거시험 등 열리는 광장으로 주로 기능
19세기 말 20세기초 육조거리 모습.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조선후기 육조거리는 국장이나 가례, 과거 시험 등 국가적 행사가 자주 열리면서 광장으로서 역할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육조거리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건국초 정립한 육조거리의 대표성, 상징성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사실, 육조의 중앙관청들은 행정실무 관청이어서 왕과의 거리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점이 고려되기도 했다. 다만, 왕과 멀어진 육조 관청들은 창덕궁 주변에 조방(朝房·임시청사)과 직방(直房·당직청사)을 설치해 다소간의 불편을 해소했다. 물론 왕을 지근에서 보좌하는 궐내각사들(승정원, 규장각, 홍문관, 예문관 등)은 창덕궁에 있었다.

육조거리는 조선후기 광장으로서 역할이 더욱 컸다. 도성 내 광활한 장소가 많지 않던 상황에서 넓은 공간의 육조거리는 다양한 행사에 유리했다. 육조거리의 주요 관서들은 국장이나 가례 등 국가 의례 행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적극 활용됐다. 도성의 중앙에 위치해 각 궁궐과의 연결이 용이했고 물산이 모이는 운종가와도 가깝다는 지리점 잇점이 작용했다.

육조거리는 과거시험장으로도 널리 애용됐다. 본래 문과는 예조에서 시행했지만 응시인원이 많을 때에는 과거시험장을 육조거리로 확장했다. <일성록> 1800년(정조 24) 3월 21일 기사에 따르면, 예조는 과장(科場)을 예조와 중추부를 포함해 북쪽으로는 광화문, 남쪽으로는 한성부 앞길까지 각각 장막을 둘러 설치해 3만2590명이 들어가는 공간을 마련했다.

거리 600년간 건재···‘군주는 백성 이끌고 백성은 군주에 복종하는’ 유교질서 구현한 공간 인식
조선시대 육조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유교적 통치이념이 구현된 이상적 공간이었다.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행정관청을 배치한 것은 군주가 인과 덕으로 백성을 이끌고 백성은 군주에 복종하는 유교의 정치질서를 현실에서 구현했음을 의미했다. 이를 통해 치국의 근간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태평성대를 염원했던 것이다.

# 도시는 멈춘 듯이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에서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의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한양의 중심,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2020

2. 육조거리, 한양의 상징대로. 서울역사박물관. 2021

3.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경국대전. 삼봉집(정도전). 허백정집(홍귀달). 용재총화(성현). 송와잡설(이기). 기재잡기(박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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