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손수호]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아십니까?"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손수호 (법무법인 지혁 대표 변호사)
탐정 손수호. 손수호 변호사 어서 오십시오.
◆ 손수호> 안녕하세요.
◇ 김현정> 오늘은 3.1절에 맞는 주제 가지고 오셨다고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친일파 얘기인데요.
◇ 김현정> 올해가 3.1절 105주년입니다.
◆ 손수호> 찾아보니까요. 6년 전 오늘이에요. 2018년 3.1절 당일에도 탐정 손수호 코너에서 친일파를 다룬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목이 여의도 면적 8배 이완용 땅 누구에게 갔나였습니다. 지금 몇 년 지났는데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105년 전 오늘 3.1운동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때 상황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이 3.1운동 이후에 오히려 친일파가 더 늘어나게 됩니다.
◇ 김현정> 3.1운동이 그렇게 크게 있었는데 친일파가 늘어났다고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일본이 무단통치라고 부르는 강력한 억압 정책을 펼쳤는데 그런데 그 후에 3.1운동이 일어나니까 일제에 충격을 준 거예요. 그러면서 무력에 의존하는 통치가 이게 통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 김현정> 그러면서 문화 통치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 손수호> 그렇습니다. 언론 자유, 정치 참여가 일부 허용되고 기술도 전수해 주겠다고 하고요. 그러자 현실에 순응해서 살자, 이렇게 생각한 친일파 숫자가 많아지게 된 거죠.
◇ 김현정> 이 정도면 살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는 거죠. 그게 사실 문화 통치의 목적이었어요, 그때.
◆ 손수호>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민족 분열 통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래서 오늘은 3.1운동과 관련 있는 특히 3.1운동 이후에 두드러진 친일파 3명을 소개합니다.
◇ 김현정> 친일파 3명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누구죠?
◆ 손수호> 홍사익입니다.
◇ 김현정> 홍사익. 오늘 소개해 주실 인물들은 다 좀 낯선 인물들 숨겨져 있는 친일파예요?
◆ 손수호> 홍사익이 유독 그래요. 홍사익이 좀 덜 알려진 건데요.
◇ 김현정> 친일파 탐구 첫 번째 인물. 홍사익, 누굽니까?
◆ 손수호> 3.1운동이 있던 1919년 6월 13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메일 신보에 이런 기사가 실립니다. 조선인이라고 결무차 군대에서 공평한 조선인 대우. 결무차(決無差), 이게 조선인이라고 해서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인데요. 당시 일본군 중이었던 홍사익을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그때 일본 군인이었는데 많은 조선인이 일본군에 끌려가서 총알받이로 죽어갔잖아요. 그런데 다 그랬던 건 아니고요. 일본군 장교가 돼서 침략전쟁에 앞장선 경우도 있었어요.
◇ 김현정> 홍사익이 그런 인물입니까?
◆ 손수호> 그렇습니다. 나중에 일본군 중장까지 장군이 됩니다. 홍사익이 그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하나였는데요. 당시 인터뷰에서 홍사익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연대급 부대에도 배치되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내가 조선인 장교라고 결단코 차별받지 않았고 이것이 육군 당국의 참 뜻이다. 이렇게 일본의 조선인 대우가 공평하다고 강조한 거죠.
◇ 김현정> 고국에서 만세 시위 벌이는 동포들 겨냥해서 일본의 충성하면 이렇게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 이걸 보여준 거네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이렇게 육군 중위일 때 3.1운동이 벌어졌고 일제가 사실상 홍보 모델로 쓴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진급도 빨라진 건데 홍사익이 육군성 인사국에 배치됨과 동시에 언론을 통한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홍사익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건 아니에요.
◇ 김현정> 그래요?
◆ 손수호> 네, 지청천, 김경천 등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운 사이였고요.
◇ 김현정> 독립운동가였던가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가까운 사이였고 또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국운이 다음에는 제국주의 무역의 길을 택했고요. 그래서 일본 육사에 간 거죠. 그런데 그 후에도요. 지청천 등이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 김현정> 어떻게요?
◆ 손수호> 일본군을 떠나라, 탈영해라, 광복군에 들어와라, 이런 제안을 했지만 계속해서 거부했다고 하고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라고요.
◇ 김현정>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결국은 일본군을 택한 거예요?
◆ 손수호> 물론 창씨 개명에 동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 김현정> 그래요.
◆ 손수호> 하지만 우리 정부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친일파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 김현정> 게다가 육군 중장까지 굉장히 높은 계급까지 올라갔고.
◆ 손수호> 그렇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37년에 중국으로 파견돼서요. 일제의 침략 전쟁에 가담했거든요. 그 후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추적하는 활동을 하는 등 한국인과 만주인을 상대하는 부서에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장군까지 오른 건데 이후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복무하던 중에 일본이 패망했고요. 결국 전범 재판을 통해서 B급 전범으로 분류되고 처형됐습니다.
◇ 김현정> 마지막은 처형이네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고요. 그 이후에 어이없게도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이 되었고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죠. 다음 인물 역시 그런데요. 두 번째 친일파의 이름은 배정자입니다.
◇ 김현정> 배정자. 이 인물은 영화나 소설에도 많이 등장해서 좀 익숙하실 거예요.
◆ 손수호>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그리고 또 일제강점기 최대 악녀라고 불리는 배정자의 친일 행각인데요. 사실 실제 기록이 사료가 아주 많지는 않아요.
◇ 김현정> 그래요?
◆ 손수호> 그래서 대부분의 기록이 배정자가 재판을 받으면서 한 진술에 기초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는 약간 좀 픽션인지 좀 애매한 부분도 있으니까 감안을 해야 됩니다.
◇ 김현정>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배정자.
◆ 손수호>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는데요. 본명은 배분남입니다. 하급 관리인 아버지가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가 사형당하면서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출가해서 여승이 됩니다.
◇ 김현정> 승려가 됐어요?
◆ 손수호> 그러다가 부친과 친분이 있던 동네부사 정병화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가는데요. 여기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만나고요. 김옥균의 소개를 받아서 1887년에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게 돼요. 이제 배정자가 이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서 양녀가 되고.
◇ 김현정>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됐군요.
◆ 손수호> 예전 독음으로는 '이등박문' 이렇게 말하죠. 승마, 수영, 사격, 변장술 이런 걸 배웠습니다.
◇ 김현정>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됐다는 것 자체도 신기한데 굉장히 미모가 뛰어나고 지식도 풍부했다 이렇게 전해진다면서요.
◆ 손수호>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그런 걸 다 배우고 교육을 수료한 배정자가요. 1894년에 다야마 사다코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조선에 돌아옵니다. 그다음에 일본어 통역인 행세를 해서 경복궁에 들어와요. 그래서 후궁인 엄귀인을 통해서 고종과 만납니다. 그리고 고종도요. 재색을 겸비한 배정자를 총애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데 배정자가 왜 굳이 궁에 들어갔느냐. 여기 궁에 들어가서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밀정으로 활동합니다.
◇ 김현정> 쉽게 말해서 일본에 스파이 노릇을 한 거예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 김현정> 사례로는 어떤 게 있습니까?
◆ 손수호> 1949년에 발행된 민족정기의 심판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는데요. 배정자는 고종이 무심코 내뱉는 말도 흘려듣지 않고 일본 공사관에 보고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추진 중이던 고종이 배정자에게 내가 러시아에 가게 되면 정자 너도 동행하는 게 어떨까? 이렇게 물어보자 배정자가 바로 그 내용을 일본에 보고했고 결국 일본이 고종의 계획을 신속하게 무산시켰다.
◇ 김현정>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무산시킨 사람이 배정자라고요?
◆ 손수호>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요. 한일합방 이후에는 친일 행위가 더욱더 노골적이 됐는데요.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단순한 밀정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본격적으로 나서서 일본의 공작 활동을 도와요. 그리고 간도와 상하이 등지에서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가 체포 활동을 합니다.
◇ 김현정> 독립운동가 체포 활동을 실제로 어떻게 했습니까?
◆ 손수호> 이게 굉장히 좀 활발하게 활동을 했고 적극적으로 했거든요. 그리고 증거가 있습니다. 당시에 급여 외에 보너스를 받았는데 기밀비로 1600원을 챙겼다.
◇ 김현정> 1600원이라면 어느 정도예요? 그게.
◆ 손수호> 1910년 당시에 상점 점원의 월급이 10원이었대요. 그러니까 160명분의 월급을 보너스로 받은 거죠.
◇ 김현정> 엄청나네요. 아니, 얼마나 악랄하게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녔으면 이렇게 많이 포상을 받습니까?
◆ 손수호> 사실 그건 또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총독부가 나중에 공로를 인정해서 땅 600평을 또 포상으로 주기도 했거든요. 또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 받으면서 지냈는데 그때도 악행이 이어집니다.
◇ 김현정> 어떤 식으로요?
◆ 손수호>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 배정자가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아서 일본군 위안부 송출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 김현정> 위안부.
◆ 손수호> 1941년 그때 70살 넘은 나이인데 조선 여성 100여 명을 군인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먼 곳까지 데려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고 업자로부터 대가를 받습니다.
◇ 김현정> 참 욕도 아깝습니다. 분명한 친일 반역자네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광복 후에 반민특위에 붙잡혔어요. 친일반역자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반민특위 와해됐잖아요. 결국 곧 풀려나게 됐습니다.
◇ 김현정> 사실은 친일파 청산을 우리가 깔끔하게 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되는데 다음에 소개할 사람도 그런 인물인가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이 얘기 한번 먼저 들어보세요.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네 사지를 묻고 형을 집행해 주시오. 그래야 민족의 본보기가 될 겁니다. 이거 자기 자신에게 말한 거예요.
◇ 김현정> 이거는 친일 행각을 인정을 하는 말인 거예요?
◆ 손수호> 맞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반성을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 신보의 사장이었고요. 또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최고의 명예였던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요. 조선 청년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전쟁에 나서서 목숨을 바쳐라라고 외친 친일파입니다. 정부가 낸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가 있는데요. 이게 총 25권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친일파가 1000명 조금 넘어요. 그런데 분량을 보면 한 명당 친일 행적이 한 20쪽 정도인데요.
◇ 김현정> 20페이지.
◆ 손수호> 이 사람의 친일 행적 무려 91페이지, 91페이지.
◇ 김현정> 누구예요?
◆ 손수호> 놀랍게도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최린입니다.
◇ 김현정> 민족대표 33명 중에 1명이잖아요.
◆ 손수호> 그렇습니다. 3.1운동을 이끌었죠. 하지만 그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인데요. 사실 최린은 만세운동 때문에 1921년 12월까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소한 직후에 전업 종교인으로 변신을 하고요. 처음에는 조선민족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반성, 각성, 실력 양성, 이게 필요하다고 강하게 믿어요. 그러다가 점점점 조선총독부와 밀착된 행보를 이어가게 되거든요. 193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각에 나섭니다.
◇ 김현정> 본격적으로 친일 행각에 나서서 뭘 어떻게 했습니까?
◆ 손수호> 34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고요. 38년에는 조선동포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39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단장이 되는데요. 이렇게 요직을 거치면서 내선일체론 등 일제의 이념을 전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또 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45년에는 조선 언론보국회 회장 이런 여러 친일단체의 간부를 맡으면서요. 위안부 그리고 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은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병으로 내몰았습니다.
◇ 김현정> 아니, 너무 드라마틱하게 변한 거잖아요. 이 최린의 경우는 왜 갑자기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절했습니까?
◆ 손수호> 조선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요. 직접 생명과 피를 바치고 국가에 대한 일본이죠. 일제에 대한 최대의 의무를 실행해서 내선 차별 철폐, 정치상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장한 것이죠.
◇ 김현정> 그러니까 독립이 되기는 글렀다라고 보고 그러면 우리 민족이 이 상황, 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야 잘 살 것인가 이렇게 나름대로는 그런 걸 추구한 거다 이런 얘기군요.
◆ 손수호> 그러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본인의 독립운동 활동 자체도 부정하기 시작해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변절 후의 최린이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어린 딸에게 돈을 좀 지어줬어요. 이 사실을 안 만해 선생이 이거 더러운 돈이라면서 대노하면서 돈을 빼앗아서 최린의 얼굴에 던졌다고 하거든요. 이때 최린이 만해에게 이런 얘기를 했답니다.
◇ 김현정> 뭐라고요?
◆ 손수호> '루스벨트여, 귀가 있으면 들어보라. 내가 닐슨의 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역적 노릇을 해왔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 김현정> 이거는 완전히 그냥 내가 독립운동하면서 역적 노릇한 게 죄였다, 이렇게 인정해버린 거잖아요.
◆ 손수호>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완벽한 친일파가 된 거죠. 이렇게 선언을 하는 건데요. 그러다가 광복 후에 1949년에 반민 특위에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재판받으면서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친일 행각을 시인하고 반성을 한 건데 그러면서 왜 도대체 그런 친일 행적을 했냐, 친일 활동을 했냐라고 물어보니까 이런 말을 했어요.
◇ 김현정> 뭐라고요?
◆ 손수호>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면 했을까요?'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라는 말을 하는 거죠.
◇ 김현정> 그 이야기를 고통당하다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이 애국지사들이 들으면 뭐라고 했을지 참.
◆ 손수호> 말도 안 되는 얘기고요. 사실 이렇게 본인의 신념을 바꾼 사람보다 끝까지 유지한 운동가들이 훨씬 더 많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계속해서 기려야 되는 것이죠.
◇ 김현정> 오늘 3.1절을 맞아서 친일파 탐구 한 3명 정도를 해봤습니다. 준비해 주신 손수호 변호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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