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할머니 환자에게, 간호실습생이 한 일[인류애 충전소]
누가 제일 보고 싶냐고 묻자 할머니는 오로지 아들 자랑, "집에 가고 싶어" 쓰기도
매일 손꼽아 기다리고, '글 대화'로 웃음 찾은 할머니, 매일 박수치며 잘한다고 응원
"할머니께서 실습 마지막 날, 아쉬워하며 손 꼭 잡으셨지요"
[편집자주] 세상도 사람도 다 싫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소소한 무언가에 위로받지요. 구석구석 숨은 온기를 길어내려 합니다. 좋은 일들도 여전하다고 말이지요. '인류애 충전소'에 잘 오셨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홍지윤씨는 당시 간호 실습 중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배웠다. 바이탈(호흡, 맥박, 체온 등) 체크, 침상 정리 등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았다.
할머니는 지윤씨를 늘 반갑게 맞아주었다. 따뜻하게 손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아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못 하는 환자였다. 그래서인지 병상엔 노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건 거기에 끼적이는 게 전부였다.
그걸로 해소가 안 될 때면, 할머니는 손짓과 발짓을 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함에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기도 했다. 대부분 "뭐라고요?", "못 알아듣겠어요"하고 넘기곤 했다.
지윤씨는 그걸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원래 누군가에 마음을 잘 쓰는 편이었다. 어릴 적엔 길에서 나물 파는 어르신을 보면 꼭 사드리곤 했었다.
목소릴 잃은 환자에게 다가갔다. 할머니가 쓴 노트엔 '힘들다'는 말이 많았다. 감정을 쏟아낸 유일한 창구. 그걸 보니 더 속상했다. 좀 더 오래 머물며 할머니가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네임펜을 들어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넸다.
'누가 제일 보고 싶으세요?'(지윤씨)
'큰아들. 잘 생겼어.'(할머니)
'집에 가면 식사 잘하실 거죠?'(지윤씨)
'누가 밥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지.'(할머니)
지윤씨에게 자세히 얘길 듣고 싶었다. 생로병사. 나이 듦과 아픔을 동시에 겪어야 했을 노년의 고단함. 무심히 스쳐 가기 쉬웠을 이에게, 2주 동안 펜을 함께 쓰며 대화를 청한 미래의 간호사와 할머니 환자 이야기를.
형도 : 공책에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누다니. 목소리가 안 나오는 환자 분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걸요.
지윤 : 평범하진 않은 방법이지요. 초반에는 좀 서투르고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지더라고요.
형도 : 그러게요. 나누신 대화를 보니 그리 느껴지더라고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지윤 : 식사는 잘하셨는지, 힘들지 않으신지 그런 걸 여쭤봤지요. 집에 가고 싶단 이야기, 아들 자랑 들어드리고요.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 속 이야기잖아요. 제겐 너무 특별하더라고요.
형도 : 질문하시면 바로 답변 써주시고, 그런 방식이었을까요.
지윤 : 질문을 몇 개 적어드리고, 일하다가 오면 답변을 써놓으신 거지요. 그런 식으로 대화를 했어요.
형도 : 할머니께선 병원에선 어떻게 하루를 보내셨을까요.
지윤 : 혼자서 걷지도 못하셨어요. 계속 가만히 침대에만 누워 계시는 거지요.
형도 : 지윤님과 공책을 주고 받는 시간이, 유일한 대화였겠어요.
지윤 : 맞아요, 진짜 저를 너무 기다리셨던 것 같아요.
형도 : 대화하고 나서 조금은 달라진 게 있었을까요.
지윤 : 환자분이 웃는 걸 별로 못 봤었거든요. 저랑 그리 대화하고 나서는 항상 웃으셨어요.
할머니도 지윤씨를 좋아하고 응원했다. 목소리는 잃었으나 대신 박수를 쳤다. 지윤씨가 병실에서 실습하다 잘할 때, 할머니는 그걸 보며 짝짝짝, 웃으며 열심히 손바닥을 부딪혔다. 말이 없어도 서로가 그리 지지할 수 있었다.
형도 : 뭔가 엄청 따뜻한데요. 잘해주시니 좋으셨나 봐요.
지윤 : 노트를 보여주셨거든요. '힘들다'라는 단어가 참 많았어요. 지치고 힘든데, 말도 못 하고 홀로 적으며 견디고 계셨던 거지요. 노트에서 70%는 속마음을 쓰신 얘기였어요. 그럼 공감해드렸지요.
형도 : 병원엔 아무래도 그런 환자 분들이 많지요. 오래 입원하신 분들도요.
지윤 : 다른 할머니 환자분 기억도 나요. 일주일에 두 번. 신장 투석하느라 투석실 내려가시는 게 병실에서 나오는 전부였었어요. 휠체어를 밀어드릴 때, 통창이 크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잠시 머물러 드렸어요. 바깥 구경을 시켜드리고 싶어서요.
형도 : 짧은 순간이지만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지윤 : 자연이 있거나 예쁜 광경도 아녔거든요. 차도, 거리, 사람 그런 모습이었는데 계속 바깥을 바라보시는 거예요. 병실로 안 갔으면 좋겠다고, 계속 있고 싶다고. 그러셨지요. 마음이 안 좋았어요. 제가 있는 동안엔 작은 기쁨이라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지요.
형도 : 실습 마지막 날에 힘드셨을 것 같아요. 인사하실 때요.
지윤 : 마지막 날이라 말씀드렸더니 너무 아쉬워하시면서 손을 꼭 잡으시더라고요. 누가 잘 챙겨줘야 할 텐데, 걱정도 들고 마음이 안 좋았지요.
어느 날이었다. 그가 눈이 빨개지고 퉁퉁 부은 채로, 복도를 걸어가는 걸 봤다. 지윤씨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보기로 했다.
형도 : 마음을 열고 싶지 않은 게 느껴지는 환자분이네요. 다가가기 조심스러우셨을 수도요.
지윤 : 사흘을 고민했었거든요. 그날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도 : 뭐라고 말을 거셨을까요.
지윤 : 처음엔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실습 나왔다고 했지요. 우시는 걸 봤다고, 혹시 무슨 일 있으신지 여쭤봤지요.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드렸어요. 마음을 여시더라고요. 저도 제가 힘들었던 걸 얘기했고요.
형도 : 그런 누군가가 필요하셨을 것 같기도 하네요.
지윤 : 실습하는 2주 동안 매일 찾아갔어요. 넷플릭스도 구경하고, 좋아하는 책도 공유하고요. 기억에 많이 남아요. 마지막 날 제게 편지를 써주셨지요.
'갑자기 터진 낯선 이의 오열에 당황하고 놀랐을텐데도 오히려 먼저 와서 위로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와 속마음을 나누어주어서 어찌나 고맙던지. 정말 착한 사람이란 건 얼굴과 웃음을 보아도 알 수 있었지만, 마음씨가 따뜻하고 그 자체로 고운 친구라는 건 겪어봐야 안다고 하지만. 그럴 것 없이 하나하나 다 고마웠어요.'
형도 : 이런 경험들이, 지윤님께 알려준 건 어떤 거였을까요.
지윤 : 말로 대화하는 게 가장 쉽고 기본적인 소통 방법이잖아요. 그렇지만 병원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단절된 사람들이 많지요. 생각을 전할 수도, 마음을 읽기도 힘들고요. 앞으로도 환자들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고 싶어요. 존엄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할 거고요.
형도 :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으신 거지요.
지윤 : 오래 병원에서 생활한 환자들이 '나는 가치가 없어', '이렇게 살아 뭐 해'처럼 자신을 자주 부정하더라고요. 그런 마음에 공감하고 작은 행복이라도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요.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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