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정말 한동훈 장관한테 사과받은 건가요?”
1심 뒤 국가는 항소 포기했지만 29일 원고들이 항소
“아버지가 긴장하셨는지 손을 떠셨어요. 세 시간 조사받는 내내 제가 손을 잡아 드렸어요.”
이봄(30)씨는 2021년 겨울의 어느 날 아버지 이종명 목사를 따라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왔다. 아버지는 그날 진실화해위 조사실에 딸과 함께 들어갔다. 아버지는 가끔 딸에게 들려주었던, 그 악몽 같은 시간에 관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군 수사기관인 보안대(현 방첩사)에 끌려가던 날, 고문을 받던 자세와 횟수, 고문을 지시하던 자의 이름,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던 순간들. 이봄씨는 가만히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었다.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진술은 공식 인정을 받았다. 1년 뒤인 2022년 11월22일, 진실화해위는 이종명 목사가 밝힌 인권침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대상자 이종명은 대학 재학 중 ROTC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507보안대에서 영장 없는 구속상태에서 조사를 받은 후 이를 빌미로 프락치 강요행위를 당하는 등 녹화공작으로 인한 피해사실과 청명계획에 의거 민간인 신분임에도 보안사령부의 지속적인 감시를 당한 사실을 확인함.”
다시 1년 뒤 같은 날인 2023년 11월2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는 이종명 목사 등 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녹화공작 및 선도업무, 프락치 강요공작 등 불법행위로 인하여 정신적 손해를 입었으므로 국가는 원고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로 9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14일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소송 당사자 2명(이종명·박만규 목사)에게 사과하고 항소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이종명 목사는 항소 포기 발표를 들을 수 없었다. 1주일 전인 12월6일 지병인 우울증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좀 웃겼어요.”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이봄씨는 그 사과가 무척 의아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별세 이후 언론과의 첫 접촉이었다. “아직도 법무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사과를 한 건가요? 우리 가족은 정말 한동훈 장관한테 사과를 받은 건가요?” 사과를 전하던 당시 보도자료는 이종명 목사의 별세 소식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몰랐던 거였다. 당일 오전 항소이유서를 법원에 제출했던 법무부가 6시간 만에 돌연 태도를 바꿨던 점도 석연치 않았다. 이후 법무부와 한동훈 장관은 이 사과와 관련한 언론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고 이종명 목사는 ‘딸바보’였다. 딸이 성인이 된 뒤에는 깊은 이야기도 자주 나누었다. 이봄씨는 “아빠가 생전에 프락치 활동에 대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수시로 학내 동향을 전화로 보고하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대요. 주변 사람들에게 신분을 속여야 하잖아요. 고문받고 강요당해서 한 거였지만 그 일을 한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컸다고 하셨어요.”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해는 전두환 정권이 집권했던 1983년이다. 고 이종명 목사는 당시 목원대 신학과 3학년 학생으로 학군사관 후보생(ROTC)이었다. 9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 ROTC 선배가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정문으로 갔다가 차에 태워져 충남도청 옆 507보안대에 끌려갔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일주일간 모진 폭행과 고문을 가하며 2년간 만났던 사람과 읽었던 책, 유인물, 토론 내용, 민주화운동 관련 활동사항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이종명 목사는 통닭구이를 당한 상태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물을 붓는 고문을 4회가량 당하고, 몽둥이로 하도 맞아 온몸에 멍이 들고 살이 터져 군복에 들러붙고 군복 밖으로 피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보안대원들은 보안사 지시를 따르지 않을 시 ROTC 제명과 함께 감옥에 가고, 장학금을 변제해야 한다고 협박하면서 학교와 교회 내 프락치 활동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그는 매일 한 번씩 전화로, 일주일에 한 번 대면으로 프락치 활동을 보고하도록 하여 두 달 가까이 보안사 정보원 역할을 했다.
목원대 신학과 동기생으로, 고 이종명 목사와 함께 국가배상소송을 했던 박만규 목사는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종명 목사는 당시 ROTC라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집이 멀어 2학기 겨울 계절학기 중 대전제일감리교회에 다니던 선배 집에서 묵었는데 그곳에서 광주항쟁 유인물을 보고 몇 번 함께 공부했던 일이 보안대에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프락치 활동이 두 달 만에 끝난 건 예상치 못한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1983년 11월경 군에 복무하다 휴가 나온 친구와 대학 앞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둘 다 보안대 프락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친구는 2시간에 한 번 보고를 해야 했고, 이종명 목사는 오후 5시에 보고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후 푸념을 하며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고 싸움으로 번졌다. 이로 인해 휴가 나온 친구는 헌병대로 가고, 이종명 목사는 폭행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된다. 결국 ROTC에서 잘리고 장학금도 변제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락치 활동은 그만둘 수 있었다.
“제가 아빠 머리를 쓰다듬어드리려고 하면 움찔움찔하시곤 했어요. 고문의 영향이래요.” 고 이종명 목사는 자다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고함을 지르다 깨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는 “때리지 마”라는 말도 있었다. 보안대에서 받은 폭행과 고문이 우울증으로 발전한 것 같다는 게 딸 이봄씨와 동료 박만규 목사의 말이다.
고 이종명 목사는 보안대 프락치 공작에서 놓여난 뒤부터 진짜 운동권이 됐다. 이봄씨는 아버지가 남긴 대학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서 젊은 이종명은 경찰과 대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목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악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 활동을 했다. 이봄씨는 “아빠는 운동권 목사”였다며 웃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유기농 농사를 권하셨고 생태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교회 어린이집 교육 프로그램을 바깥놀이 중심으로 바꾸고 오병이어 사업이라 해서 독거노인을 위한 반찬 배달 사업을 하셨죠. ‘반딧불이’라는 이름의 지역아동센터도 건립하셨어요. 마지막 목표가 장애인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거였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여기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옳다고 생각하면 좀 고지식하게 달려들어 일하는 스타일이셨어요.”
성악을 전공한 이봄씨는 자주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이종명 목사가 참여하고 있는 ‘고난 함께’라는 현장에서였다. 말 그대로 고난받는 이들의 현장에서 예배를 보는 모임이었다. 덕분에 세상 문제에 많이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2014년에는 광화문 광장 세월호집회에서, 가장 최근에는 시청 앞 이태원 참사 추모예배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봄씨가 주로 부른 노래는 민중가요 ‘노래여 날아가라’와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찬송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였다. 딸의 노래를 듣고 난 아빠는 늘 “고맙다”고 했다. 딸은 “왜 아빠가 고맙냐. 이런 곳에서 노래할 수 있게 해줘서 내가 고맙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어렸을 때부터 차 타고 어디 가거나 하면 다 같이 화음 넣고 노래했어요. 가족들과 가장 자주 불렀던 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였고, 노래하고 나면 아빠는 ‘행복하다’는 말을 하셨어요.”
이봄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빠 같은 피해를 보신 분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프락치 한 게 본인의 잘못은 아니에요. 이제 그걸 강요했던 국가가 피해자분들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죠.” 인터뷰가 끝나고 헤어진 뒤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문자 메시지로 묻자 이런 답이 왔다. “아빠가 내 아빠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 수 있었을지 상상이 안 돼요. 그런 아빠를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계속 함께 늙어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나중에 만나면 꼬옥 안아주고 고맙다고 하고 싶어요.”
이종명 목사의 1심 승소 후 피고인 대한민국은 항소를 하려다 갑자기 포기했지만, 원고는 항소하기로 했다.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피고는 책임을 부정하고 기계적인 소멸시효 항변을 하는 등 진실화해위 권고사항을 전혀 이행하지 않음에 따른 불법행위가 성립했음에도 원심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29일 법원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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