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외 한글 수업에 돌봄까지… 학원이 ‘유치원 행세’ [심층기획-영어유치원의 그림자]
교육청에 ‘영어 학원’으로 신고 불구
홍보 때도 학원 빼거나 유치원 표현
학부모 요구 충족 위해 과목 더 늘려
면적 등 더 필요해 추가 신고는 꺼려
교육부 “돌봄 등 교습행위 아냐” 입장
제재 예고했지만 법 개정 지지부진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 사는 A씨는 소위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 원생의 3년 차 학부모다. A씨의 자녀는 평일이면 매일 오전 9시30분쯤 등원해 영어 수업을 듣고, 학원에서 점심도 먹는다. 오후 2시30분쯤 정규 수업이 끝나면 한글·미술·발레 등 요일별 방과후 선택 수업이 시작된다. 선택 수업 후에는 원에서 마련한 ‘돌봄교실’에 40분 정도 머물다가 오후 5시30분쯤 집으로 돌아온다. 정규 활동이 끝난 뒤 다양한 추가 수업과 돌봄을 제공받는 일상은 언뜻 보면 일반 유치원과 비슷해 보이지만, A씨 자녀가 이용하는 프로그램 중 상당수는 ‘불법’이다. 해당 원은 교육청에 ‘영어만’ 가르치는 학원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29일 교육부에 따르면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원 운영자는 등록된 교습과목만 교습해야 하고, 위반 시 행정처분을 받는다. 현재 전국에 800곳이 넘는 영어유치원은 ‘실용외국어(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으로 신고 후 영업 중이지만, 영어만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학부모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방과후 수업 형식으로 한글이나 수학, 과학, 예체능 등 다양한 과목을 함께 제공한다. 이 경우 교습과목을 추가 신고해야 하지만 대다수는 법을 무시한 채 배짱 영업 중이다.
교육 당국은 전국 800여개 영어유치원 중 다른 과목까지 신고한 곳은 극소수라고 보고 있다. 급식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외부 업체 음식을 제공하고, 점심시간까지 교습시간으로 잡아 교습비를 받는 곳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교육부는 각 기관에 올해 상반기 재점검 전까지 신고하지 않은 교습과목을 정리하거나 추가로 교습과목을 신고할 것을 안내했다. 사실상 유치원처럼 운영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현장 변화는 지지부진하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과목을 더 신고하려면 면적 등이 추가로 필요해 학원들이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라며 “추가로 신고한 학원이 많지는 않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영어유치원이 우후죽순 늘자 지난해 대대적인 단속을 예고했다. 3∼5월 전국 847개 원을 전수 점검해 301곳(35.5%)에서 518건의 위반사항을 적발하기도 했다. 위반 사유는 △학원 명칭표시 위반 66건 △교습비 초과 징수 62건 △교습비 게시 위반 43건 △시설 위반 39건 등이었다. 교육부는 단속을 통해 편법·불법 운영을 막고 더 나아가 ‘학원을 유치원처럼 운영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방침이지만, 단순히 명칭이나 교습비 초과 징수 등 단속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수준의 단속으로는 또 다른 편법 운영만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일부 원은 영어 외 수업은 다른 사업자에게 결제하게 하는 식으로 편법 운영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도 이런 한계를 인식해 지난해 6월 유아교육법을 개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재 초·중·고 단계에서는 학교가 아닌 기관이 ‘사실상 학교 형태로’ 운영하면 초·중등교육법에 따라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유아교육법에는 관련 규정이 없어 초·중등교육법처럼 ‘사실상 유치원 형태로’ 운영하는 기관을 제재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어학원이 현재처럼 5∼6시간 이상 수업하며 유치원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문제는 발표 후 8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 진전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법 개정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진행 중인 사안이 없다”고 설명했다. 교육부가 발표만 요란하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정부가 유아 대상 영어학원을 유치원처럼 운영하지 못하도록 법률 개정을 한다는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진행도 더딘 것은 문제다. 법률 개정이 하루빨리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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