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존재에서 생성으로, 생성에서 존재자로

최원형 기자 2024. 3.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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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세계철학사’ 완간
19~20세기 철학사 두텁게 집적
현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계철학사 4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
이정우 지음 l 길 l 5만원

우리 학자가 세계철학의 광대한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담아내려고 한 야심 찬 기획이 13년 만에 완결됐다. 이정우(65) 소운서원 원장이 집필해온 ‘세계철학사’가 ‘지중해세계의 철학’(1권), ‘아시아세계의 철학’(2권),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3권)에 이어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4권)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작업을 “전통과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성이라는 구도에 입각해 철학·사유의 역사 전체를 음미하는 여정”이라 갈무리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세대와 함께 살았던 전통의 세계, 그 후 아버지 세대와 함께 살아온 근대 세계, 그리고 지금 내가 아이들 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탈-근대적 세계”, 이 세 세계를 모두 이어서 사유해야 했기에 자신의 작업은 ‘세계철학사’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구성의 실타래는 전통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여야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권은 “탈근대적 철학으로서의 현대 철학이 전통 철학의 한계를 넘어 전개된 근대 철학을 이어받되 그것이 여전히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 살핀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현대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의 귀환’이다. 3권에서 지은이는 고대의 형이상학을 거부한 근대 과학기술과 그에 영향을 받은 근대 철학이 과학적 탐구를 위해 고안된 방법들에 존재론적인 실재성까지 부여하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자연과학에서 성립하는 패러다임을 인간·사회에 덮어씌운” 결과, 근대 철학은 인식 주체가 세계 바깥에 서서 세계의 총체적 그림을 파악해낸다는 식의 인식론, 세계를 공간적 좌표와 양적 척도로 환원해버리는 등질화, 결정론, 인과론 등의 오류들을 내장하게 됐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현대 철학자들은 철학사의 원점, 곧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현대의 형이상학은 고대의 형이상학과 다르다. 지은이는 현대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특징을 ‘생성존재’라는 개념으로 묶어낸다. 책의 1부인 ‘형이상학의 귀환’은 이 새로운 사유의 흐름을 ‘존재에서 생성으로’, ‘창조하는 삶’, ‘사건의 철학’ 등 세 갈래로 짚는데, 앙리 베르그송과 질 들뢰즈 등이 그 주역으로 호명된다. 존재, 영원, 필연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서구의 고대 형이상학은 각 개별자들이 각각 존재의 어떤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동일성’에 대한 사유로 흘렀고, 그것은 ‘x는 왜 존재하며, 왜 바로 그렇게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충족이유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 철학에서 부각된, 세계를 공간·외연·양으로 환원하는 능력인 ‘합리적 이성’과 그 근저에 흐르는 ‘등질화’ 역시 “영원한 본질”을 찾으려는 이 서구 사유의 흐름에 포획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2019년 ‘세계철학사 2’를 냈을 당시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그러나 “현대 형이상학의 핵심 갈래인 생성존재론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일차적인 실재로 봄으로써 철학의 모든 문제를 새로이 했다.” 그 출발점은 무(無), 시간, 우연이다. 존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경계가 무너질 때 비로소 생성되며,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생성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근저에 이미 주어진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시간’이 놓여 있음을, 또 그것을 움직이는 원리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것을 뜻한다. “세계는 시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결정론적인 곳이 아니라 새로운 질들이 끊임없이 창발하는 곳이다.” 이제 현대 철학은 영원한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동감 있게 흘러가는 생성을 사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은이는 시간과 지속, 창조 등을 중심에 놓은 베르그송 등 생성존재론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유들,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진화론을 놓지 못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다르게 ‘횡단’으로서 창조적 ‘절화’(折化)의 사유까지 나아간 들뢰즈와 가타리, 생성존재론의 한 갈래로서 실천적인 문제를 강하게 내포하는 ‘사건의 철학’ 등을 살펴본다. “이 시점에 이르러 서구 철학은 역(易)과 기(氣)를 근간으로 사유해온 동북아 철학사, 화(化)의 사유를 전개해온 인도 철학사와 만나게 된다”고도 짚는다.

지은이는 생성존재론과는 다른 차원에서 근대의 합리성을 유연하고 참신하게 갱신하려 한 시도들, 현상학과 구조주의, 심리/자연철학 등 인간 주체의 여러 측면들을 논의해온 시도들도 두텁게 다루며 19~20세기 철학사의 흐름을 총망라한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의 문제도 충실하게 다룬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 한겨레 자료사진

특히 지은이는 ‘타자의 사유’를 “20세기 후반의 철학이 일구어낸 가장 중요한 흐름들 중 하나”로 주목한다. 푸코가 집중한 타자의 역사,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펼친 타자의 윤리학,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 윤리학 등을 이런 흐름 아래 묶는다. 지은이가 “이들의 논의를 다른 철학자들의 것과 변별해주는 중요한 한 측면은 그것이 생성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 보는데,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타자에게로 생성해가려고 하는 행위”, 곧 ‘타자-되기’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가 타자의 철학이 실현된 시대는 아니지만 실현되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타자의 철학을 더욱 잘 가다듬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도 새긴다. 자연·인간·기계가 서로 맞물려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생태철학이 요구되는가, 인간·동물·기계 3자의 관계는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인간의 인간 지배를 깨기 위한 저항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인간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요구되는가 등이다. 이런 물음의 배경에는 우리가 아직 깨지 못한 근대성의 딜레마가 있다. 인간을 창조적 ‘주체’로 만들어줬으나, 다른 한편에선 ‘인간 개체군’의 한 요소로 지배당하게 만든 자유주의와 그 극단적인 변형태인 ‘생명정치’다. 지은이는 “근현대의 철학은 이렇게 주체로서의 인간과 ‘인간 개체군’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라는 양극의 인간상 사이에서 전개된 드라마”라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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