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힘과 국가의 힘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책&생각]
법치와 국가폭력 등에 업고 득세
신좌파는 불평등 외면으로 실패
평등과 민주적 가치 회복이 해법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l 원더박스 l 2만3000원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프랑스 학자들의 2021년 저작을 번역한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 붙인 사회학자 장석준의 해제 제목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낡은 가치 및 체제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는 왜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게 이 의문문의 취지이지만, 사실 이 제목은 반어적이다. 애초에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번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들(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은 프랑스 파리 낭테르대학의 소피아폴 연구소 소속이자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에서 “신자유주의의 역사에서 폭력과 내전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에 대해 공동 연구를 진행”해 왔노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이 가운데 다르도와 라발이 함께 쓴 ‘새로운 세계합리성’은 2022년에 번역 출간된 바 있다.
해제에서도 보다시피 신자유주의는 목하 번창 중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가 내전이라는 선택을 핵심적인 지배 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책의 프랑스어 원제가 ‘내전이라는 선택’인바, 이들이 말하는 내전이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격렬한 정치·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가리켜 전쟁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는 일들은 실제로 내전”이라고 이들은 강조한다.
책의 첫 장은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상대로 한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와 그 이후의 칠레 상황을 다룬다. 쿠데타를 조장하고 지원한 미국의 역할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진행된 사태들이다. 피노체트 정권은 1978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새로운 노동법을 공표하는데, 그 핵심은 노동조합의 권리 제한과 복수 노조 설립을 통한 노동자 조직 분열에 있었다. 이와 함께 연금과 보건, 교육, 사법, 농업과 농지 문제 등을 망라하는 전면적인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더 나아가, 1980년 9월11일에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개정 헌법은 칠레의 정체(政體)를 ‘주권이 핵심적으로 국가에 있는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정의함으로써 인민주권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삼권분립이 무색할 정도로 대통령에 쏠린 권한, 상원과 헌법재판소, 중앙은행 등 주요 기구에 대한 제도적 장악 등은 신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을 완성하다시피 했다. 칠레가 “하나의 모델이자 역사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서술이다.
“신자유주의는 잠재적으로 자유를 말살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국가 개입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에 완전히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식의 정치 설화가 존재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역사 재구성일 뿐”이라는 게 지은이들의 판단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국가를 배척하는 시장지상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국가의 폭력적 개입을 통해 소유권과 시장을 지키고자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이 경제 이론의 주창자인 것을 넘어,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기획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 영역에서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법과 조치, 제도의 확립을 통해 향후 어떤 사회주의적 정책들도 도입할 수 없게끔 방벽을 세우고자 한다.” 2008년 이후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의회의 엘리트와 언론인의 대대적인 지지와 결합한 ‘법치’에 의해 좌파 정부의 전복이 정당화된” ‘합법적 쿠데타’ 또는 ‘제도적 쿠데타’가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80년대 영국 광부 노조의 파업을 굴복시킨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 미국에서의 노동법 관련 규제 완화와 점증하는 불평등, 2018년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 등은 법치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럽과 미국의 ‘좌파 자유주의’가 ‘후진적’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며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해 왔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싸움을 중단하고 중산층의 좀 더 ‘현대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선택한” 신좌파는 1990년대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일부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기층 민중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받아온 지지를 잃는,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했다. 반동적 신자유주의와 ‘진보주의적’ 신자유주의의 이런 협공 속에 개인들은 성과와 경쟁력의 압박에 시달리는 고립된 ‘자기 경영자’의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19세기 이래로 사회적 질서를 변혁하려는 전망이 이토록 암울했던 적은 없”다고 지은이들은 탄식한다. 그렇다면 출구는 없는가.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에 대한 무력화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보자.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에 대한 대응은 평등과 민주적 가치를 위한 투쟁을 축으로 삼아야 한다.” 지은이들은 과거와 같은 “핵심 계급, 집단적이고 단일한 서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오늘날 현실의 다양한 사회적 대립은 더 이상 두 계급 간의 적대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등이라는 일반적 요구”가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 정체성이든 ‘다수’의 정체성이든, “정체성 물신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평등’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다른 투쟁들의 정당성과 갈등의 가치 역시 강조하는 결론은 다소 이상주의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모호한 태도는 신자유주의를 상대로 한 싸움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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