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은 왜 없나 [책&생각]
우크라이나 전쟁 통해 미 패권 약화하려
다원 패권 시대, 한반도 평화 해법 제시
전쟁 이후의 세계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l 한겨레출판 l 2만원
러시아 출신 한국학자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고 깊이 있다. 마치 한국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분석들을 내놓는 그는 한국어로 무려 53권의 책을 출간했고, 54번째 책으로 ‘전쟁 이후의 세계’를 최근 내놨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사회의 지형도를 그려보고,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우리나라가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제시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저자는 1991년 12월25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어떤 경로를 거쳐서 현재의 러시아가 됐는지 설명한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좌파 지식인의 관점으로 러시아 사회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해주는데, 군더더기가 없고 명료하다. 저자는 푸틴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국가주의, 군사주의, 교권주의, 팽창주의를 꼽는다. 그는 푸틴 대통령에 대해 “계급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으며 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오로지 ‘국가’와 ‘인민/민족’만을 언급”하는 “보수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푸틴 정권에는 오로지 국가 발전이 최고의 선이며, 사회적 약자나 환경, 기후에 대한 고려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팽창을 중시하는 푸틴 정권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약화시키고 다극 세계 체제 속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움직인다. 푸틴 정권이 바라는 다극 패권 체제란, 러시아의 손 아래에 있는 구소련 권역과 동유럽, 중국 패권이 확실한 동아시아, 인도 패권이 지배하는 남아시아, 이란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본위의 중동, 독일·프랑스 지도하의 유럽 등과 같은 여러 강국으로 구성된 세계다. 저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것도 러시아의 영향권 구축에 우크라이나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국 패권 약화는 러시아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각국이 보여주는 태도에서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중국, 인도,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등 세계의 각 지역 강국이 러시아 제재에 불참하며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결과가 2020~2030년대 헤게모니 교체 시대의 세계 재분할의 포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저자는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일종의 경제적 ‘발전 전략’ 차원이라고 분석한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일본 중심의 자급자족형 경제 블록을 만들려는 전략이었듯, 러시아도 강철, 알루미늄, 우라늄과 같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우크라이나를 장악해 국제 경쟁에서 보호받는 ‘경제 영토’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은행 자본과 정보기술 자본 등을 키우려는 ‘발전 전략’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이 책은 푸틴 정권의 의식 깊숙이 깔린 이데올로기 정체와 정권의 목표를 짚는 동시에 러시아 시민 사회의 현황도 함께 전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젊은이들이 강제징집되고 전쟁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푸틴 정권의 감시와 억압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러시아에서는 눈에 띄는 강력한 반전 운동이나 정권 반대 운동이 일지 않고 있다. 독자들로서는 왜 그런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데, 러시아 출신인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푸틴 정권의 강도 높은 억압과 선전 전략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저항을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책은 그보다 민중을 저항으로 이끌 만한 정치 세력이 없다는 점을 지목한다. 1980~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에서 당시 공동체 역할을 했던 직장 공동체가 해체됐고, 러시아 사회는 ‘각자도생’ 사회가 됐다는 것. 과거 소련에서는 현장 노조위원장의 동의 없는 해고가 불가능했는데, 1991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공장 지배인들이 쉽게 해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저임금에 해고의 위험에 처해 있던 공장 노동자들은 직장 공동체를 이탈해 자영업에 뛰어들거나 개인 텃밭을 운영하는 등 러시아 시민들은 ‘원자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공업의 상당 부분은 군수공업인데,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전시 동원 면제라는 특권을 누리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어 저항의 동력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책은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내놓는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현재 국제 질서 재편과 관련된 직간접적 전쟁과 대립에 연루돼 있고 잘못하면 한반도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에만 치우친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신냉전’에 가까운 국제 질서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국제 질서 판도를 잘 읽고 정부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국지전 등이 일상화된 ‘전쟁의 시대’에 전쟁 없이 한반도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저자는 ‘평화 지향적 균형 외교’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국과 일본만이 아닌,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도 긍정적이고 평화적으로 협력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건설하고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반도 평화’를 중심에 두고 실리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라는 것. 적극적인 남북 협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가 제시하는 ‘균형 외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설사 그렇더라도 박 교수가 말하는 ‘다원 패권 시대’는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복잡한 세계 지형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려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해야 함을, 또 이를 위해 시민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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