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제 독자에게 좀 불친절하기로 했소”

임인택 기자 2024. 3. 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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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작가 윤흥길 ‘문신’
4·5권 더해 ‘필생역작’ 완간
어휘·율조에 주연같은 조연
역경 속 생동하는 민중 재현
“한국문학 패션화 잘못” 비판
작가 윤흥길(82)이 “필생의 역작”으로 이른 장편 ‘문신’이 이달 4·5권으로 완간을 맞았다.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어휘, 작법 등을 두고 “독자들에게 좀 불친절하기로 마음먹고 썼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문신 4·5
윤흥길 지음 l 문학동네 l 각 권 1만6500원

‘완장’과 ‘장마’의 작가 윤흥길(82). 그의 최신 장편 ‘문신’은 3월1일 5권으로 완간되기까지 도합 25년 걸렸다고 출판사는 소개한다. 작가는 면구해 하며 수치를 바로잡는다.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사실은 32년 됐다”고, “처음 서두 시작한 때로부터. 30년 넘었다 하면 창피해서 그렇게 됐다”고. 그 노작가도 수식 하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했는데, 바로 “필생의 역작”이라는 말이다. “막판에 건강도 너무 나빠져 제대로 끝낼 수 있겠는가, 소설을 쓰다 사람이 죽는 수도 있겠구나 했”던 작품이었다.

2018년 나온 ‘문신’ 1~3권에 파란만장 굽이치던, 일제 강점기 전라도 산서마을 천석꾼 최명배를 둘러싼 일가의 삶은 6년 만에 내놓은 4~5권에서 해방 전후로 향한다. “참으로 끔찍스럽고 징글징글한 세월… 환란으로 날이 밝고 환란으로 날이 저물”던 때다. 두 차례 걸친 완간 여정에서 한 가지는 그대로고, 한 가지는 달라진다. 거대한 전환시대 부표하는 민중을 작은 마을의 가족사와 그들의 걸쭉한 입말체로 ‘유비’시키는 형식이 전자라면, 마침내 조역이 숨은 주역이 되어가며 꿰뚫어지는 민족적 정체성 내지 죽지 않고 견뎌내는 삶의 의미가 후자겠다. 무엇이든, 완고한 작가주의 없이는 불가능했을 도정이다.

4~5권의 대마루는 아무렴 최명배의 첫딸 순금과 순금이 반려자로 맞은 신춘복 사이 빚어지는 모든 장면들이다. 춘복이 누구인가. 대지주 최씨네 머슴이다. 덩치 좋고 힘만 셀 뿐 “사람 말소리”를 지어보지 못한 “반푼이”다. 도시에서 유학까지 했던 순금이 부모를 이겨 내고 맺은 인연은 그러나 몇 개월도 못 가 위기를 맞는다. 춘복에게 열흘 말미로 날아든 강제징용장 탓이다. 순금은 울며, 몸부림치는 춘복의 어깻등에 돗바늘로 ‘문신’을 새긴다. 소설의 모티브이자 제목인바, 이 과정과 이튿날까지가 실로 눈대목이다. 생사의 지난한 원리는 알 길이 없으니, 눈앞 글자나 심고 그 작은 글자의 뜻만이 또렷하므로 사력으로 붙드는 듯한 의식의 하나하나가 펼쳐진다. 무너지지 않는 욕망과 본능 그대로, 운명의 ‘지랄병’을 견디려는 민중의 처방이랄까.

전쟁에 징발되는 가족에게 ‘살아 돌아오라’, ‘죽어도 돌아오라’ 뜻을 새겨온 부병자자(赴兵刺字)의 풍속을 무지렁이 시부모에게 순금이 설명한다.

“듣고 봉깨로 입묵(入墨, 문신)이 맞는 말이고만.”(시아버지)

“무신 글씨를 새기는 게 좋으시겄어요?”

“똥이라고 적으시지라!” “똥맨치로 태어나서 똥맨치로 살다가 똥맨치로 가는 이니께 그러콤 적어주시기라우!”(시어머니)

‘문신’을 완간한 윤흥길 작가는 지난달 27일 출간 간담회에서 “한 나라의 문학적 경향이 패션화하는 것에 굉장히 반대한다”며 근래 문학 풍조를 비판했다. 문학동네 제공

머슴네 버릇으로 존대를 버리지 못한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지만서도 순금이 애당초 생각해둔 글자는 아니다. 그렇게 새빨간 핏물 방울방울 맺힌 끝 춘복의 왼쪽 어깨 견갑골에 “봄” 글자 하나가 핀다. 제 하얀 속치마로 피를 훔쳐내는 순금 곁에서, 춘복의 팔 하나씩 쥔 채 두 노인네가 곡을 한다. 단지 징용에의 암운 탓일까. “사람 말소리”를 낼 기회 없던 ‘천것들’에게 또다시 닥친 고난에 서린 한이 깊다. 하지만 이튿날은 어떤가. 춘복이 “사람의 말소리”를 내고 시어머니가 순금에게 말을 놓는다. 미리 맛본 봄날 같다. ‘문신’ 첫 권을 여는 첫 장의 제목이 ‘더디 오는 봄’인 뜻이 비로소 알 만해진다. 슬픔과 해학이 뒤엉킨 판소리의 가락으로, 말하자면 ‘춘복들’의 ‘똥’부터 ‘봄’까지 그들의 언어로 노래토록 하는 게 4~5권 ‘문신’의 도량이고 힘이다. 작가의 설명대로, 춘복은 “어려 접한 아기장수 설화의 잔상”인데 “소설의 주변 인물이었을 뿐 이번 주인공처럼 격상”된 적이 드물다.

최명배의 위세는 1~3권에서 무너져 왔다. 풍까지 맞는다. 사회주의 신사상에 물든 아들(귀용, 셋째)의 반역에 이어, 잘 가르쳐놓은 순금의 선택이 창씨개명해가며 물 만난 듯 권세를 쌓던 최명배에겐 비로소 ‘망국’이었다. 이에 견줘, 병에 걸려 무력한 냉소주의자가 된 큰아들 부용(둘째)의 아이, 춘복 없이 순금의 아이가 해방둥이처럼 태어나 새 시대를 맞는 게 4~5권이다.

이 중차대한 전환의 국면에서 작가의 기독교적 세계관도 적극 구실 한다. ‘부병자자’로 환유된 민속적 염원과 유대의 습속을 신실한 기독교도인 순금이 좇으면서 ‘귀소본능’은 종내 구원을 향하는 듯 보인다.

‘문신’은 이번 작품을 포함해 전체 10권짜리 3부작으로 당초 구상되었다. 연재하던 잡지 둘이 중도 폐간되었고, 세 차례가량 건강이 크게 위협받았다. 작가는 “‘큰 작품’을 쓰라고 했던 박경리 선생님에게 나로선 쓰기가 너무 힘든데 왜 쓰라고 하셨는지 물어보니, 큰 작품은 긴 작품이 아니고 인간, 인생, 인간 사회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라고 해 계획을 줄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말마따나 “대하소설”을 “중하소설”로 바꾸되, 생경해도 생동하는 우리말과 사투리를 쏟아내고, 욕지거리를 개발하고, 토속정서를 감각시키기 위한 판소리 율조를 한껏 품었다.

작가는 아예 “독자들에게 좀 불친절하기로 마음먹고 썼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마음은 지금 문학계 풍조를 향한다. “현재의 한국소설들이 거대담론 대신 미세담론 쪽으로 많이 흐르면서 파편화된 개인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보는 ‘작가의 말’은 27일 간담회에서 이렇게 이어졌다.

지난해 등단 55년을 채운 윤흥길 작가는 이미 새 작품 자료 수집에 들어간 상태다. 그는 “소설을 써야만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라며 “원고 말미에 ‘끝’ 자 하나 보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한 나라의 문학적 경향이 패션화되는 것에 굉장히 반대한다. 작가 개인의 성향, 문학관이 다르다면 백인백색의 소설이 나와야 할 텐데, 대세가 한 나라의 문학 풍토를 석권하고 있다. 굉장히 잘못되었다. 후배들은 그렇게 쓰지만 ‘나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일부러 불친절을 떨었다.”

55년 경력의 작가는 이제 조선조 말을 배경으로 한 소설 자료를 수집 중이고, 내년 집필에 들어갈 참이다. “3년간 금연했던 한때, 소설 한 편을 못 썼어요, 소설을 못 쓰니 사는 것 같지 않았죠. 소설을 써야, 창작 욕구를 충족시켜야 나는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구나 느꼈습니다.” 어쩔 수 없겠다, 꼬장꼬장 노작가의 불친절은 더, 계속 시전되어야 하니까.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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