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기획] '붕어빵은 일본의 도미빵?'…일상에 남은 日잔재

박헌우, 서예원, 장윤석 2024. 3. 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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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주년 3.1절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의 문화'
'과거 기억하고 역사 바로 세워야'

겨울철을 대표하는 국민간식 '붕어빵' 원조는 일본의 '도미빵'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국내로 들어오며 '붕어빵'으로 바뀐 이면에는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속이 팥으로 가득 찬 붕어빵. 1950~60년대 당시에는 싸게 구입해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서민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더팩트ㅣ박헌우·서예원·장윤석 기자] '일본의 도미빵이 한국에선 붕어빵으로'

우리가 즐겨먹는 붕어빵은 1930년대 일본의 타이야키(たい焼き)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타이야키의 타이는 한국어로 '도미'를 뜻한다. 이 '도미빵'은 일제강점기에 국내로 들어오면서 '붕어빵'으로 정착됐고, 시간이 지나며 우리에게 친숙한 붕어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붕어빵은 1950년대 6.25 전쟁을 지나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퍼졌는데, 당시 미국에서 대량으로 밀가루를 원조해 준 게 계기였다. 값싸게 구입해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서민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일본의 디저트 중 하나인 '도미빵'이 대한민국의 겨울철 대표 간식 '붕어빵'으로 바뀐 이면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붕어빵과 함께 사랑받는 국민간식 풀빵. 일본 국화빵의 모습이 보인다.

또 붕어빵과 모양은 다르지만, 밀가루 반죽에 팥을 넣어 굽는 방법과 재료가 같은 '풀빵'도 일본의 '국화빵'에서 전래됐다.

풀빵과 붕어빵은 지금까지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이제는 붕어빵과 역세권의 합성어인 '붕세권'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겨울철 대표 간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서울의 한 전통시장에서 구매한 풀빵이 일본의 국화빵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일본이 남긴 흔적들이 있다. 학교에서 쉽게 보이는 교복과 교실 속 태극기, 수학여행, 학예회, 운동회, 지명, 유치원, 인감증명서, 장례식 등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더팩트> 취재진은 올해 105주년을 맞는 3.1절을 기념해 아직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알리고 청산하기 위해 일상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일본의 얼룩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다.

요즘 빵집의 트렌드는 'ㅇㅇ당'?

많은 곳의 빵집·과자점 등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 영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가게나 업체의 이름 뒤에 '-堂(どう, 도오)'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집'이나 '장소'를 뜻하는 말로 해당 가게의 특징이나 건물의 위치를 나타낸다. '-堂'을 그대로 읽으면 '당'. 우리나라의 많은 제과점이나 빵집의 이름이 '당'으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 곳곳에서 '당'으로 끝나는 이름의 제과점이나 빵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00년에 육박하는 기간 운영되고 있는 군산의 한국 최초 빵집은 1920년대 일본인이 문을 열어 영업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빵집' 혹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번성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당'으로 끝나는 명칭으로 변경돼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서 한국에 빵과 과자가 유입되었고, 이후 빵 기술자의 수가 증가와 함께 빵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거리에서 '당'으로 끝나는 제과점이나 빵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지폐에도 남아있던 일본의 흔적

천원권과 엔화의 모습이 서로 비슷한 모습이다. 한국은행 구 천원권(왼쪽), 일본의 엔화(오른쪽)

2007년 이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에서도 일본 잔재가 남아있었다. 2007년 이전까지 사용하던 지폐의 핵심 요소인 인물초상과 한글 문자의 배열, 형식, 직인 등이 일본 지폐와 똑같았다.

또 우리나라 지폐의 발권 주체가 '한국은행총재'가 아닌 '한국은행'으로 적혀 있다. 이것은 회사의 대표가 결재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회사 이름으로 서명한 것과 같다. 세계 각국의 지폐를 살펴보면 대부분 발권당국의 최고책임자의 친필 서명 또는 직인이 찍힌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엔화와 한국의 지폐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문제 등을 바로 잡고자 2007년부터 발행하는 신권에서는 '한국은행권'이라는 표기에서 '권'을 지우고 지폐 발행 주체를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 총재'로 바꿨다.

또 문자 배열과 간격도 맨 위 두 줄인 '한국은행'과 'O 천원'은 붙이고 맨 아래 위치한 한국은행 총재는 간격을 두어 심미적인 효과를 높이면서 엔화와의 차별성을 뒀다.

도입된 지 110년, 불편한 ‘인감증명서’

도입된 지 110년 된 ‘인감증명 제도’는 올해 9월부터 디지털 인감으로 개편된다.

인감증명서는 서류에 날인된 인감이 본인의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민원 문서로 국가에 '내 도장'을 등록시켜 놓는 것이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 내 경제 활동을 보호할 목적으로 인감 제도가 도입됐고 인감증명서는 100년 이상 본인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우리나라에 사용돼 왔다.

인감증명서는 국가에서 보관과 관리가 불편한 점, 재발급 시 직접 읍·면·동 주민센터에 방문해야 하는 점, 범죄에 쓰일 위험이 높다는 문제점이 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4년 6개월간 발생한 인감증명 사고 건수는 총 2048건으로 법적 효력이 큰 인감을 이용한 위조와 도용 범죄는 매년 발생해 왔다.

한 시민이 인감증명서를 발급을 위해 서울 동작구청 발급기를 이용하고 있다.

도입된 지 110년 된 ‘인감증명 제도’는 올해 9월부터 디지털 인감으로 개편된다.

디지털 인감이란 온라인 발급, 기관 간 공유, 간편인증 등으로 인감증명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부24’를 통해 인감증명서를 전자파일 형식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 일제의 잔재인 인감 제도가 110년 만에 폐지를 앞두고 있다.

◆ 일제 '창씨개명'도 모자라 '창지개명'까지

서울 종로구·중구에는 아직 많은 곳이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은 지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정리'라는 명목 아래 우리 땅 이름을 멋대로 바꾸고 일본식 지명을 갖다 붙이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서울 방문 시 필수로 찾는 인사동은 일본이 지은 지명이다. 원래 인사동은 절골이나 대사동이라고 불렸는데, 일본은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근처 지명인 관인방의 '인' 자와 대사동의 '사' 자를 합쳐 인사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낙원동 역시 탑골공원을 지칭하던 ‘낙원지’에서 따온 ‘낙’과 동리 명칭인 ’원동‘에서 따온 ’원‘을 합쳐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창지개명'은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본과 동화시키기 위한 식민 정책 중 하나였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삶과 지혜가 녹아있던 토박이 지명은 사라지고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름만 남게 됐다.

창지개명의 주 타깃이 된 서울은 아직까지 30% 이상이 일본식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가 시행되면서 기존의 일본식 지명에 대한 개선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중지도에서 노들섬으로 개명되었다.

한강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중지도라고 불리던 섬은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가 시행되면서 일본식 지명을 버리고 '백로(노)가 노닐던 징검돌(돌=들)'의 의미를 가진 노들이라는 아름다운 지명을 되찾았다. 이는 일제가 강제로 바꿔버린 지명을 되찾은 좋은 선례로 남았다.

일제가 남기고간 일본식 주택 '적산가옥'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2층식 건물 구조와 밖으로 돌출된 비대칭 창문, 박공지붕(경사지붕)이 당시 일본식 주택의 특징이다.

적산 가옥(敵産家屋)이란 '적의 재산' 혹은 '적들이 만든'이란 뜻을 가진 '적산'과 '가옥'을 합쳐, 말 그대로 '적들이 만든 집'을 뜻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은 건축물 중 일본식 주택을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1929년 일제강점기 당시 ‘학강’이라 불리던 후암동 일대는 일본인을 위한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장충동의 ‘소화원’, 북아현동의 ‘금화장’과 더불어 경성의 3대 주택지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일본식 주택의 또다른 특징인 목조 구조가 외부에 노출돼 있는 모습도 후암동에서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후암동은 경성 도심과 가깝고 풍광이 좋아 남향의 집을 지을 수 있어 많은 일본인이 선호하는 거주지역이었다. 또한 용산은 일본군 사택과 함께 조선은행, 조선총독부 직원의 사택이 모여있던 곳으로, 현재 후암동 일대에 많은 적산가옥들이 남아 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국내에 있던 적산가옥들은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에 매각돼 현재는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후암동 일대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적산가옥'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이면서 역사를 증명하는 뼈아픈 사료다.

고종황제 "보행자와 차마는 우측통행하라"

서울역 공항철도와 대합실을 잇는 에스컬레이터는 다른 곳과 달리 좌측통행으로 설치돼 있다.

2024년 지금 우리는 우측통행을 원칙으로 한다.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제22조(보행자 통행의 우선 등) 2항에 따르면 "보행자길에서는 우측통행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과거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도 보행자와 차마(車馬)는 우측통행하도록 지시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1년 초선총독부는 자국과 같은 방식으로 차와 보행자 모두 좌측통행하도록 했다. 해방 이후 자동차는 미국의 영향으로 우측통행으로 바뀌었지만, 보행자는 특별한 지시 사항이 없어 좌측통행을 유지했다.

지난달 27일 한 시민이 서울 서초구 7호선 내방역에서 역방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다 휘청이고 있다. 우측통행에 익숙한 시민들은 좌측통행으로 만들어진 이 역사에서 자주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 2009년 정부는 88년 만에 '우측통행의 새로운 보행문화 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시범운영을 거쳐 2010년부터 공식적으로 우측통행을 시행했다.

우측통행이 시행된 지 14년이 지난 2024년 아직도 좌측통행의 흔적을 우리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측통행이 자리 잡은 지금 남아있는 좌측통행의 흔적을 지워 시민들의 사고 위험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유치원도 일본의 잔재? "유아 학교로 변경해야 한다"

'幼稚園(요치엔)'을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 '유치원'이다.

유치원이라는 단어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1837년 독일의 교육가가 설립한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이 최초의 유치원이며 일본식 발음은 '幼稚園(요치엔)', 한국식 발음은 유치원이다.

한국에서는 1897년 부산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부산유치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유치원으로 불리고 있다.

국내에 있는 유아교육 시설은 대부분 '유치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변경한 것처럼 일부 교육계에서는 유치원도 유아 학교로 변경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 세대가 부르는 동요 '퐁당퐁당'도 日 잔재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홍난파의 퐁당퐁당 악보.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동요 '퐁당퐁당'. 어린 시절 우리가 친구의 손등을 때리는 율동과 함께 흥얼거리던 동요 역시 선율과 음계, 박자 모두 일본 동요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이후 일본은 우리 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음악에 주목했다. 일본 속국의 국민으로 한국을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와 창가, 일본 전래 동요가 우리나라 아이들의 교과서에 실렸다.

이때 한국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음계가 바로 '요나누키 음계'다. 요나누키 음계는 7음계 가운데 '파'와 '시'가 빠진 일본식 5음 음계로 '도레미미 도미 솔라솔'로 진행되는 '퐁당퐁당'과 '솔솔라라 솔솔미'로 진행되는 '학교 종이 땡땡땡'이 이에 해당한다.

퐁당퐁당의 작곡가 홍난파는 '고향의 봄'과 '봉선화', '햇볕은 쨍쨍' 등을 작곡해 근대 음악의 선구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사전에 따르면 홍난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으며 이를 찬양하는 음악을 짓거나 연주한 기록이 있다.

'퐁당퐁당'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왜 왔니’,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똑똑똑 누구십니까’ 등의 오래된 동요들. 부모님 세대를 지나 2024년의 초등학생들도 흥얼거릴 수 있는 대중적인 동요들인 만큼 기원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위바위보 만큼 흔한 '묵.찌.빠'도 일본에서?

묵찌빠는 '군함에 의한 침몰과 파열'이라는 뜻을 가졌다.

가위바위보를 응용한 놀이인 '묵찌빠' 역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묵찌빠는 일본에서 '구찌빠' 또는 '구조끼빠'로 불렸다. 세대에 따라 그 단어의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구'는 군함이나 구축함, '찌'는 침몰, '빠'는 파열을 의미해 ‘군함에 의한 침몰과 파열’이라는 뜻으로 일제의 군국주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쎄쎄쎄'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또한 식민지 시절 일제의 영향을 받은 놀이다.

조선총독부의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공표된 '의례 준칙'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직원이 상복을 정리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의례 준칙'을 공표하며 비단과 명주 같은 원단으로 수의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면서부터 한국 전통 장례법이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기존 한국에서 삼베옷은 '유가족들이 고인을 잃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입던 상복으로 쓰였으며 수의로 사용되는 것은 금기시됐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삼베 수의가 아닌 '생전에 고인이 입었던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례식에서 유족이 차는 완장은 상주와 문상객을 구분해 독립운동가를 걸러내기 위함으로 우리나라 전통 장례문화에는 완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잔재(殘滓)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이나 생활 양식의 찌꺼기"

1919년 한반도에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지 '105년'이 흘렀고 현재 우리 일상에는 일본의 '찌꺼기'가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외쳤다.

이 땅에서 태극기가 펄럭일 수 있는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잘못된 것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선조들의 피나는 희생 덕분에 우리는 자유를 찾았지만, 아픈 흔적은 쉽사리 지우기 힘들어 보인다.

3.1절을 맞은 이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역사를 바로 알아 일제 잔재 청산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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