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여기까지?…청년들 주거엔 왜 ‘여지’가 없나[책과 삶]

박송이 기자 입력 2024. 2. 29. 22:04 수정 2024. 2. 29. 22: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김정민 지음
놀 | 229쪽 | 1만6800원

여지(餘地). 한자풀이 그대로 ‘남은 땅’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뜻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이다. ‘남은 땅’이 있어야 ‘가능성’이나 ‘희망’도 싹틔울 수 있다. <즐거운 남의 집-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의 저자인 건축가 이윤석은 책의 첫 장 ‘여지의 여지’에서 주거의 ‘여지’에 대해 말한다. ‘여지가 있는 집’은 ‘집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있는 집이다. 여기에 침대를 놓고 저기에 텔레비전을 놓을 수밖에 없는 집 말고, 여기는 이렇게 쓸 수 있고 저기에는 이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집이다.

공간의 여지는 일상에 생각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1인용 크기의 사무실에서 더 큰 공간으로 옮긴 지인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전에는 1인용 크기의 작업만 했던 지인은 이제는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작업의 규모를 키웠다. 지인 스스로도 이렇게 큰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다. “공간이 클수록 만드는 작업물의 크기도 커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커진 공간이 큰 작업물을 만들도록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 사회의 청년 주거에는 ‘여지’가 없다.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정부가 청년 주거정책으로 제시하는 유형은 대부분 ‘최소 주거면적’에 해당하는 14㎡ 크기의 원룸이다. 그마저도 청년 주거의 흔한 형태로 여겨지는 고시원, 고시텔, 원룸텔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저자는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삼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고 비판한다.

<즐거운 남의 집-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은 1990년대생 건축가 이윤석·김정민 두 저자가 건축가, 생활인, 청년, ‘남의 집에 사는 사람’ 등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거에 대해 쓴 에세이다. 그들 자신의 이야기도 쓰고, 그들이 만난 같은 세대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도 담았다. 불안정하고 열악한 청년들의 주거는 익숙한 이야기지만, 책은 집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저자 김정민은 ‘행복주택’에 두 번 떨어진 후, 신혼부부에게 더 많은 당첨의 기회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안행복주택’은 그가 서울주택공사(SH), 한국토지주택공사(LH) 관계자들에게 전하는 편지다.

<즐거운 남의 집 -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의 이윤석(왼쪽), 김정민 작가. 놀 제공
1990년대생 두 건축가, 자기 경험과 같은 세대 생생한 목소리 담아
청년 삶은 과도기로, 거주공간은 과정 공간으로 여기는 현실 비판
“잠깐 빌린 집이라도 인생의 발명가처럼 설계해보자” 제안도

“(신혼부부) 전형은 정말 징그러운 전형이라고 생각해요. 결혼의 유무(여부)로 어떤 기회를 더 준다는 게 저는 소름 끼쳤어요. …계속해서 ‘넌 여기까지야. 넌 이건 안 돼. 조금 더 왔네? 하지만 여기까지야. 더는 못 가’라는 말을 듣는 기분이었어요. …지금은 사다리가 중간에 툭툭 잘려 있어서 올라가기가 너무 무섭네요.”

저자는 녹물이 나오고 물이 새는, 재건축만 기다리는 45년 된 아파트에 세들게 되면서 혹시나 아파트가 무너질 때 챙겨나와야 할 물건들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포레’ ‘마운틴’ ‘리버’ 같은 단어가 붙은 아파트들이 한강, 남산, 인왕산 등의 ‘뷰’를 독점한 반면, ‘옆진 창문 뷰’ ‘빨간 벽돌 뷰’인 빌라에 살면서 행인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시야를 차단해야 하는 현실을 토로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한국사회가 청년들의 삶을 ‘과도기’로 여기고, 아파트가 아닌 거주공간을 ‘과정의 공간’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 담장”의 도시는 공유를 상상하기 힘든 공간이다. 유독 청년들에게는 주방과 세탁실이 없는 ‘최소한의 집’을 선택하게 하고 나머지는 공유 플랫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통근시간을 줄이기 위해 월세 50만 원을 무릅쓰고 회사 근처에 집을 얻자 이번에는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집주인에게만 좋은 짓을 한다고 핀잔을 준다. “내가 절약한 시간으로 만든 일상들은 50만 원과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은 결혼, 아파트 자가소유 등의 목표로 돌진해야 할 ‘과도기’의 삶에 사치가 된다. 아파트 창호는 기술의 집약체가 됐지만 빌라의 방범창이나 가림막은 이용자의 편의에 대한 고려 없이 과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빌라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아파트가 될 과도기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청년들이 맞닥뜨린 주거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며 일상을 기념해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은화, 경수 부부는 20평 아파트의 방 하나를 ‘고주망태의 이산화탄소 방’이라고 부른다. 문을 떼어낸 방에는 큰 찬장과 큰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부부가 친구들을 불러 요리를 해먹고 음주를 즐기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조리대도 싱크대도 작은 원룸 거주자에게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일상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저자 김정민은 고시원과 원룸에 살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건축 구조와 사회 구조가 ‘네가 감히 원룸에서 요리를 하려 들어? ’전자레인지 하나로 끝내는 100가지 요리법’ 같은 책이나 사서 간단히 해 먹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은화·경수 부부처럼 방 하나를 쓸 수 없더라도 작은 식탁 하나를 이용한 ‘식탁테리어’를 통해 요리하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습관만들기 앱을 개발하는 인석에게 집은 하나의 실험실이다. 그는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 매일 반복하는 일들을 잘게 쪼개고 집 안의 사물들을 그에 맞게 최소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스트레칭과 명상을 자주 하기 때문에 좁은 집이지만 바닥을 최대한 비워두고 가구들은 최대한 작고 편한 것들로 구했다. 그의 집은 “정리된 매일을 보내며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달력 같은” 공간이다.

저자는 공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낸 이들을 “자기 인생의 발명가”라고 부른다. “없으면 만들고, 불편하면 고치고 하는 그런, 진지하고 피곤하지만 가끔씩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한없이 들뜨는 발명가가 되길 잘했다고 말하는 그런 발명가 말이다.”

책을 읽고 나면 자가·전세·월세 등 부동산적 가치라는 기존 문법을 떠나 자신의 삶을 담고 있는 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저자 김정민은 에필로그에서 “내가 사는 이 집이 잠깐 빌린 집일지라도, 사실은 내 집임을 어떻게든 소리치고자 했다”라며 “이 소리가 어디로 향할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공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데에 어떤 알리바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