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감별의 쓴맛, 감당할 준비 됐나

이용욱 기자 입력 2024. 2. 29. 20:09 수정 2024. 2. 2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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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현장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검사·판사 등 법조인 출신, 군 출신, 관료 출신,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다녀온 운동권 출신들도 예외가 없었다. 화법은 달랐을지언정 모두 공익과 자기희생을 말했다. 기자 역시 일부 정치인들의 진심을 믿었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좋은 정치인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여의도를 보면서 정치에 품었던 열정과 기대가 부질없었음을 깨닫는다. 공인의식은 간데없고, 사리사욕에 매몰된 정치인들만 득실거린다. 몇몇 사람들이 의원이 된 후 나쁘게 변해가는 과정도 봤다. 열정은 개인적 욕심으로, 한때의 겸손은 특권의식으로 바뀌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국민 무서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혐오를 불렀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파문을 보면서 여의도가 더 싫어졌다. 이재명 대표는 시스템 공천을 강조했지만, 과정은 의혹투성이고, 결과는 편파적이다. 친명 의원들은 공천받고, 이 대표에 비판적이던 의원들은 불이익을 받는 현상이 너무도 뚜렷하다. 반대편을 조사 대상에서 배제한 여론조사를 돌리고, 체포동의안에 가결표를 던진 것으로 의심되는 의원들을 지역구 관리 하위 10~20%로 분류했다는 소문도 사실로 확인됐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지 않으면 배척 대상인가. ‘사당화’ 비판은 과하지 않다.

컷오프된 친문들을 옹호할 마음은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이들도 강경 지지층을 등에 업고 반대의견을 찍어눌렀다. 문재인 정부와 당시 주류인 친문들이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비판도 타당하다. 그러나 이 대표도 도덕성 논란을 털어내지 못한 약체 후보였다. 무엇보다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대선 후보가 지는 것이다. 이제 와서 누구 때문에 졌느냐고 논쟁하고 책임소재를 묻는 행태가 웃기고 옹색하다. 윤석열 정부 폭주에 대해 견제 역할을 해야 할 제1야당이 내부 분열로 비틀거리는 게 맞는 것인지 묻고 싶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패배하게 만드는 마법은 주류의 전횡과 탐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역대 총선의 법칙이었다. 민주당이 그러한 법칙을 깰 만큼 국민들의 견고하고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컷오프로 떠들썩하지만, 사실 민주당 공천은 누가 들어가고 빠지는 문제의 차원을 넘었다. 공천 기준이 이 대표를 보호할 사람을 골라내는 것으로 비치고, 그런 프레임이 굳어진 게 본질적 문제다. 이 대표와 부딪친 의원들의 지역구나, 친명계 원외인사 등이 점찍은 지역구 의원들이 여지없이 교체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이 대표는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선수 선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 뒤 총선에 출마하고 당대표에 당선되고,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을 번복하는 방탄단식을 한 이 대표도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 민주당 일각에선 이 대표가 공천을 마무리한 뒤 대표에서 사퇴할 것이란 말도 들린다. 자신을 보호할 후보들을 공천했으니, 총선 국면에서 여론의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뒤로 물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장판 공천 장면은 국민들의 뇌리에 박혔다. 사천 낙인이 찍힌 후보들이 본선에서 얼마나 경쟁력을 발휘할지도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총선이 떠오른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과반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박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80~90명 정도의 의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진박감별사’로 불린 청와대 수석들과 여당의 친박 핵심들은 ‘박 전 대통령 퇴임에 대비한 충성파를 뽑아야 한다’며 공천에 개입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친박 후보들에게 유리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선거캠페인까지 지원했다. 하지만 과반수를 차지할 것이라던 여당은 청와대 공천 개입의 역풍을 맞아 1당을 내줬고, 박근혜 정부는 탄핵 등 몰락의 길을 걸었다.

찐명을 골라내는 감별사는 누구인가. 이 대표 측근 의원이거나 비선일 수도 있고, 이 대표 자신일지도 모른다. 찐명감별사가 누구든 진실한 친박을 내리꽂으려다 역풍을 맞은 박근혜 정부의 전례를 곱씹었으면 한다. 이 대표 측은 시끄러운 국면만 넘기면 정권심판론이 작동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지만 ‘이재명 민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도 그 못지않다. 유권자들의 날카로운 감식안을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치는 정치권의 어리석은 행태를 번번이 지켜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이용욱 정치에디터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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