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합정역, 보름달, 이방인
물론 소란도 좋지만 단란은 더욱 좋아서 잊은 듯 잊힌 듯, 정든 땅 언덕 같은 파주에서 단출히 지내다가도, 서울에 또 볼일이 생기기는 마련이라 좌석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유유히 달려 합정으로 간다. 언젠가 국민MC 유재석씨가 유산슬이란 예명의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면서 히트한 노랫말대로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이지만 이곳도 여느 곳과 사뭇 다를 바 없는 한 지하철역이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항상 한 움큼씩의 사람들이 합치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는, 해변처럼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고작 30여분 만에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는 것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그렇다고 도시물을 모를 리 없지만 벌써 파주의 듬성듬성한 분위기가 그립고 뭔가 질척거리는 늪의 기운이 알싸하게 퍼지는 것 같다. 이를 중화시키려 불러오는 풍경 하나. 그 옛날 덕유산 아래의 고향에서 새벽밥 먹고 거창읍 차부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날의 아침과 천일여객 타고 하루 종일 달려 고무신 위로 발등이 퉁퉁 부은 채 내렸던 종점의 저녁을 한꺼번에 영접하는 것이다.
휘발유 냄새, 미세먼지쯤이야 이제 그냥 무뎌진 몸. 하차등에 불이 들어오고 내릴 차례다. 두세 칸의 버스 발판을 디딜 때 이런 생각도 한다. 그 언제 적 우주인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아폴로 달 착륙선의 계단을 망설이며 내릴 때처럼 그런 기분을 호출하는 것. 그렇게 그런 마음을 먹으면 실제 아무 생각 없이 후다닥 내릴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발바닥을 치고 올라온다.
드디어 휘황한 도시에 착지했다. 차가운 불빛과 스쳐 가는 눈빛을 몸에 두른 채 이제부터 난처한 이방인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더욱 낯선 기분을 만지작거린다. 달은 그냥 못 본 체하면 안 되는 동네다. 이 뒷골목은 언젠가 세상 떠날 때 스치게 될 달의 이면과 자매결연한 도시일지도 모를 거라고 여기는 순간, 아뿔싸, 빌딩 사이 보름달이 떠 있구나. 그렇다면 여기는 불빛의 분화구일지언정 달의 표면은 분명 아니다. 순진한 상상력은 너무 쉽게 박살이 났다. 발등 아래 밑창으로 생각을 구부리면, 나를 운반하느라 지친 구두의 밑바닥. 달의 피부와 가장 닮았을 그곳을 느끼며, 축축한 골목 끝의 외딴 약속장소를 찾아 내 걸음으로 간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00m 앞 응급실 퇴짜’ 심정지 대학생 결국 숨져
- ‘의료대란’에 70대도 돌아섰다···윤 대통령 지지율 20% 취임 후 ‘최저’
- [스경X이슈] 정국의 뉴진스 응원 거센 후폭풍…누리꾼 “1~4세대 한마음”
- “무시해” 뉴진스 하니가 고발한 따돌림, ‘직장 내 괴롭힘’ 해당될까?
- [구혜영의 이면]김건희라는 비극 2
- 소송 져서 19조원 돈방석 앉게 된 아일랜드 ‘난감하네’
- 우주비행사 눈에 ‘특수 콘택트 렌즈’…폴라리스 던에 이런 임무도
- 문다혜 “인격 말살에 익숙해지고 무감해지는 사람은 없다”···검찰수사 비판
- 손흥민에 ‘인종차별 발언’ 동료 벤탄쿠르, 최대 12경기 출전 정지 징계 위기
- 김건희, 마포대교 순찰···“경청, 조치, 개선” 통치자 같은 언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