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할매 열전]한센떡, 장센떡
어린 나는 늘 한센네가 궁금했다. 동네 사람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집, 동네서 유일하게 장을 담그지 않는 집, 장판 대신 가마니를 깔고 사는 집, 커다란 똥개와 함께 먹고 자는 집. 한센은 대대로 우리 집안 종이었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장 너머 신작로까지 굵은 가지를 뻗친 채 주렁주렁 익어가는 그 집의 양자두 맛이 제일 궁금했다. 우리 동네에 양자두라곤 한센집의 딱 두 그루뿐이었다. 조선 자두보다 두 배는 크고 새빨간 양자두는 어쩐지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물건 같기도 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양자두가 탐나서 홀린 듯 바라본 적도 있었다. 우연히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한센과 눈이 마주쳤다. 한센은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한센떡도 그랬다. 내 부모 연배쯤 되었을 그들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살금살금 걸었다. 계급이 사라진 지 오래건만 그들은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듯했다. 한센은 말없이 가장 크고 잘 익은 자두 세 개를 따서 담장 너머로 내밀었다. 나는, 도망쳤다. 댓 살쯤의 기억이다.
어느 설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설날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집집마다 세배를 다녔다. 한센집만 빼놓고. 무슨 생각이었던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한센집에 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는 엄마는, 그 모든 사람 속에 깔끔하지 않은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베룩이라도 옮으먼 워쩔라고 그러냐며 나를 막았다. 아버지는 딱 한마디만 했다.
“댕게 오니라.”
평생 처음 나는 한센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몇 번이나 부른 뒤에야 방문이 열렸다. 한센떡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설날인데도 머릿수건을 쓰고 무슨 일을 하던 중이었는지 옷에 보얀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때부터의 짧은 대화를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워쩐 일이다요?”
“세배드리러 왔어요.”
“워쩌까요? 참말 워째야쓰까요?”
한센떡은 머릿수건을 벗어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려는 듯 바닥에 깔린 가마니 장판을 여러 번 쓸었다. 내외는 나와 함께 맞절을 했다. 나는 고작 열일곱이었는데. 콩깨잘이라도 먹고 가라 했지만 왠지 목이 메어 서둘러 나왔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아래 계곡 쪽에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사람들은 평생 이런 칼바람 속에서 살아왔겠구나. 이렇게 움츠린 채로. 계급의 무서움을, 어쩌면 습성의 무서움을 나는 그날 처음 실감했던 것 같다.
한센은 머지않아 세상을 떴다. 한동네 장센떡도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간질이 있던 장센떡은 젊은 나이에 하필 물 찬 논에 얼굴을 박고 숨을 거뒀다. 산비탈에서 일을 하다 발작을 일으킨 것이려니 다들 짐작했다. 장센떡은 고등학생부터 돌도 지나지 않은 막내아들까지 자식 여덟을 남겼다. 장센은 당연히 여자가 아니라 아이들 키워줄 엄마가 필요했다. 낯선 여자들 몇이 장센집을 드나들었으나 아무도 반년 이상 버티지 못했다. 장센 아이들은 갈수록 꾀죄죄해졌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신작로를 걸어 고향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첫 집이 장센집, 빠글빠글 아줌마 파마를 한 낯선 여자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는 왔는가, 아는 체를 했다. 집에 당도해서야 아줌마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센떡이었다! 몇 달 사이 한센떡이 장센떡이 된 것이다. 그이는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남의 자식 여덟을 제 피붙이인 양 살갑게 키웠다. 허리 질끈 동여맨 한복도 벗고 낭자머리도 풀었다. 사람들 앞에서 굽실거리지도 않았다. 어린 사람에게는 당당히 반말을 썼다. 평범한 농부인 남편의 신분이 자신의 신분이라 여겼을 테지. 장센은 10여년 전 세상을 떴고, 정붙여 키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네가 그이를 부산으로 모셔갔다.
종의 아내였던 한센떡, 농부의 아내였던 장센떡, 그이의 이름은커녕 성조차도 모른다. 자두가 익어갈 때면 뜬금없이 그 집 울타리 밖에서 새빨갛게 익어가던 양자두가 떠오르고, 한센떡으로 고달팠던 그이의 말년이 장씨 아이들로 인해 충만하기를 나도 모르게 간절히 염원하게 된다. 이름도 없이 살았던 그이가 부디 21세기 여성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기를.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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