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12) 진주성 3·1독립운동 기념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조선인들은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시위를 주동할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족대표 33인은 한 명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탑골공원에서 300m 떨어진 태화관 술집에서 그들끼리 행사를 했다.
이 시각, 조선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탑골공원을 나섰다. 세계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가혹한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유혈충돌이 발생했고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증폭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탑골공원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뇌관은 진주에서 터졌다.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시위를 벌여야 했기에 시위 장소는 진주, 오일(五日) 장터로 정해졌다. 3월18일 진주헌병대는 조선총독부에 전화로 보고했다. “진주장터에서 조선인들 소요가 발생했습니다. 폭동분자들 중엔 노동독립단, 걸인독립단, 기생독립단이란 이름의 단체와 백정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주 3·1독립운동은 학생과 양반이 주도한 타 지역과 달리 멸시받던 하층계급들이 적극 참여했다. 민족해방과 함께 신분차별을 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원했던 것이다. 최고 비상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일제 경찰은 시위대에 잉크까지 뿌렸다. 시위 참여자를 모두 체포하겠다는 엄포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2만~3만명으로 점점 늘어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진주헌병대로 향하다가 곤봉세례에 무참히 진압당했다.
푸틴의 정적으로 얼마 전 사망한 나발니가 “한국이 민주화된 것처럼 러시아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편지를 옥중에서 썼다. 진주성 내에 3·1독립운동 기념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사수(死守)에 동의한 진주양민 6만명은 일본군에 전원 몰살당했다. 그들의 피가 스며 있는 진주성에 1971년 세워졌다.
“너의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 주어진다”는 체 게바라의 말처럼 우리가 임진왜란, 3·1독립운동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한국은 나발니가 부러워하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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