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태아 성감별
1990년은 ‘백말띠’ 해였다. 말띠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 기승을 부렸다. 1980년만 해도 여아 100명당 남아 105.3명으로 자연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105명)에 가깝던 신생아 성비가 1990년 116.5명으로 뛰었다. 둘째·셋째 아이로 갈수록 성비는 더 올라갔다. 둘째 아이 117.1명, 셋째 아이 193.7명이었다. 대구·경북 지역은 공포 그 자체였다. 셋째 아이 이상 성비가 대구 392.2명, 경북은 294.4명이었다. 그해 태어난 남아가 34만9617명, 여아가 30만121명이었다. 자연성비를 고려하면 1990년 한 해에만 3만명 이상의 여아가 태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런 기형적인 성비 통계가 한국 사회에 불러온 법이 있다. 1987년 제정된 ‘태아 성감별 금지법’이다. 임신하면 가장 궁금한 게 바로 아이의 성별이지만, 의사에게 태아의 성별을 물어보는 것이 금기가 됐다. 운이 좋아야 출산에 임박해 ‘분홍색 용품을 준비하세요’(딸), ‘아이가 형을 닮은 거 같네요’(아들) 식으로 귀띔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의사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중단됐다. ‘서울지검 특수2부는 불법으로 태아 성감별을 해준 15개 산부인과 병원을 적발해 의사 ㄱ씨(54) 등 5명을 구속했다’(1996년 10월2일자 경향신문).
특수부 검사들까지 나섰던 ‘태아 성감별 금지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8일 의료인이 임신 32주 이전에 임신부나 가족에게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한 의료법 20조 2항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시대가 달라지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 호주제가 폐지됐고, 아들이 부모 노후를 책임진다는 통념도 희미해지고 있다. 헌재는 ‘성평등 의식’이 지난 30년 동안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유례없는 저출생 현상도 성비 불균형 개선에 기여했다. 2014년부터는 신생아 성비가 모두 자연성비 범위 안이다. 셋째 아이도 그렇고, 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
헌재 결정을 환영한다. 예비 엄마·아빠가 아이의 성별을 알고 싶은 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다. 부모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이기도 하다. 성차별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도 차별받지 않도록 더 노력하는 일이 남았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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