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되는 시간을 건너는 법

한겨레 2024. 2. 2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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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16 _초라함의 상대성

마음이 통하는 시간을 나누다 보면 ‘다름’은 애써 발견해야 하는 숨은그림찾기가 된다. 볼에 콩알만 한 점이 있는 작가와 1년 넘게 가요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10m 전방에서도 점부터 보이는 친구였다. 하루는 자기한테 달라진 것이 없냐고 물어왔다. 샅샅이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친구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점 뺐잖아!” 마음이 통하고 난 뒤였다.

누구나 ‘다름’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들의 ‘다름’이 언제나 안녕하기를 소망한다. 게티이미지뱅크

1992년,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한 칸을 차지하고 눈물을 쏟았다. 훌쩍거림이 칸막이를 넘었는지 한 여성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괜찮아요?”

들어올 때 얼핏 눈이 마주쳤던 두 명 중 한 명 같은데, 서른 남짓해 보였고 둘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괜찮아요’ 소리가 나왔을 터다. 다른 한 명이 친구에게 하는 말처럼, 그러나 나 들으라는 듯 ‘사회가 좀 그래’ 하며 비굴했던 직장 이야기를 꺼냈다. 딱 봐도 학생티가 나는 사회초년생에게 자기 흑역사를 꺼내 나의 흑역사를 별일 아닌 거로 만들어주려는 위로였다.

그날 그곳은 회식 자리였다. 피디들과 리포터들이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이다. 나는 나이트를 몹시도 싫어했다. 노래방도 싫었다. 그러나 열심히 춤추는 나를 보아야 했다. 잘보이려 애쓰면서 그걸 사회화라고 세뇌하는 나 자신이 구차스러웠다. 나는 리포터로 카메라를 이끌며 현장을 누비기는커녕 일반인 인터뷰 대상자들의 말도 잘 끌어내지 못하면서 도리어 원망하던 어리바리한 초보였다. 내 취향 따위를 표현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더랬다.

시간이 흘러 한 방송국에서 라디오 피디 6년차로 일할 때, 구제금융(IMF) 시절이던 그해 여러 언론사가 공채를 하지 않아 역대 최고의 학력과 학벌을 가진 신입사원이 들어왔다며 회사가 술렁였다. 수습인 피디, 기자, 아나운서들이 편성제작국에서 교육받는 동안 회식이 열렸다. 2차로 노래방에 갔다. 신입들의 탬버린 소리가 한순간도 끊이지 않았다. 최신곡을 열창하고 랩을 발사하며 40대 선배의 노래 ‘아파트’에도 군무를 췄다.

나는 서글펐다. 기원전 3세기, 장자는 위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며 즐거이 노닌다고 물고기의 즐거움을 헤아렸다지만, 나는 그들이 극한 야근을 한다고 해석했다. 회식 자리까지 공고했던 위계에서 수습의 난처함을 아는 척하고 싶었다. 비록 입안에 물고 있던 ‘너무 열심히 하지마!’를 볼멘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주류 중심 여흥에 신물 난 지 오래였다.

남들도 지나고 나서야 자기감정을 해석하게 되나? 서른두살에 미국으로 이주하고, 내가 20대에 겪던 감정을 여러 단어로 꼽아보게 됐다. 애송이라는 2등 시민, 여자라는 2등 시민. 쓸모 있음을 증명해야 자격을 얻기에 악착같은 노력이 당연한 대기자들. 나는 사회라는 입국심사대 앞에 서 있었다.

실제로 이민 심사를 받고 국경을 넘은 다음엔 단지 생김새의 ‘다름’만으로도 몸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인간에게 시각정보는 절대적이다. 소수자를 약자로 솎아낸다. 성소수자들 중에서도 트랜스젠더가 더 빈번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겪는 것도 이와 같을 터다.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을 계속 받으니 ‘대체 정체성이 뭐길래’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다름’에 대한 근거인데, 내 경우 답 찾기는 수월했다. 성인으로 이주했고 출신지에 사는 다수와 같은 피부색에 국적도 한국인이라서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답을 찾는 과정은 복잡했다. ‘결핍’부터 찾도록 강요받고, ‘있음’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시간을 3살부터 탐색하도록 사회가 자극했다. 소수자로서 금 밖으로 내쳐진 다음, 작은 몸뚱이 안팎의 힘을 길러 무리 속 진입을 모색한다. 청소년기까지 반복한다.

이민가정 아이들 대부분이 대입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정체성 찾기 여정을 쓴다. 윤리적 뇌가 발달하는 10대 후반이어서 일 수 있고, 소수자의 목소리가 세를 이룬 시대라서 일 수도 있지만, 물속에서 물고기가 물을 찾지 않듯 주류는 정체성에 대한 자극을 받지 않는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 30·40대들에게 물어봤다. 다들 정체성에 대한 자기소개서는 고사하고 질문조차 품지 않았다고 했다. 백인 이성애자 여성 샤 또한 페미니스트였지만 어머니가 가정을 책임져서 소수자성에 대해 고뇌하진 않았다고. 샤가 처음 정체성을 고민한 때는 필라델피아 도심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할 때였다. 유일한 백인으로 흑인 학생들과 수업했다.

한 사회의 문화 동질성이 높을수록 ‘다름’에 대한 배제가 당연시된다. 사고의 관성. 고려인 아나스타샤는 어릴 적 살던 우즈베키스탄을 샐러드볼 사회라고 일컬었다. 아파트 위층에는 슬라브인,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아래층에는 타타르인, 그리고 고려인처럼 강제 이주한 유대인이 살기에 자신을 고려인이라고 소개해도 이는 정보 제공일 뿐 약점이 아니었다.

9살에 미국에 이민 온 변호사 그레이스 심은 자신을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규정한다.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문화적으로 한국인인데, 한국 대 미국 축구 경기에서 미국이 이겨도 기분 나쁘지 않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내가 정체성을 물어 본 스무 명 남짓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레이스와 같았다. 적어도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30~40대들로, 아시아인이라는 개념도 없다. 그 개념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경찰이고, 교사이며 이웃인 곳에서 즉 한국을 제1국으로 삼는 사람이 지역을 아시아, 지구로 확장할 때 갖는 동류의식 같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에서 황인종 한국인이 왜 백인을 우대하고 동일시할까?’ 가졌던 의문이 조금 풀렸다. 나이지리아 흑인들도 백인과 동일시한다. 1등 시민이 1등 지구인 (백인우월주의 사고일지라도)과 동일시하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 구호인 ‘Black Lives Matter(흑인도 중요하다)'에 그리 공감하지 않는다고 아프리카에서 온 친구들이 전했다.

그레이스는 미국인이 곧 백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자신도, 인도계인 형부도 미국인이라고. 유년의 공간, 청소년기 삶의 터전은 한 사람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공간이 곧 각자의 세계이고 그 속에 마음을 이루는 관계가 얽힌다. 한국에 이주민 2세 3세가 자라고 있다.

왜 주류가 타인의 소수자성, 이방인의 시간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함께 살고 있어서다. 주류 곁에 있고, ‘다름’이 드러날 때마다 정체성을 묻는 말을 받는다.

“어디서 왔어요?”

20년 전 귀화한 방글라데시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미국계 한국인도 수시로 받는데, 속뜻은 ‘왜 여기 있어요?’일 것이다. 질문 하는 그대는 왜 거기 있을까? 고양이는 고양이를 선택해 태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도 인간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태어난 곳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다만 잘 살고자 의지를 북돋워 이주를 감행한다. 한국 경제는 이주민 없이 작동 불가능한 상태에 다다랐다.

경남 한 도시에서 유년을 보낸 소희는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대학에서 감성에 맞는 친구들과 공감하며 한국인에 안착했다. 영화감독으로 이주민 인권 활동을 하며 지금은 5% 정도 외계인 같은 시간을 보낸다. 연순은 한국 엘리트 관문이라 꼽히는 서울법대에 가서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느꼈다. 쉐프인 민주는 조각을 하다 요리를 한다는 이유로 동료로부터 초라함을 강요받았다. 그래도 손님이 남긴 말에 과거의 초라함 마저 녹아내렸는데, 바로 ‘고민해온 시간이 느껴져요’였다. 노력을 믿어주고 ‘애썼다’라고 인정하는 마음이 우리의 숨을 고르게 한다.

마음이 통하는 시간을 나누다 보면 ‘다름’은 애써 발견해야 하는 숨은그림찾기가 된다. 볼에 콩알만 한 점이 있는 작가와 1년 넘게 가요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10m 전방에서도 점부터 보이는 친구였다. 늘 생방송 전에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하루는 자기한테 달라진 것이 없냐고 물어왔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샅샅이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친구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점 뺐잖아!” 마음이 통하고 난 뒤였다.

누구나 ‘다름’을 안고 살아간다. 그 다름이 초라함의 길목이 되지 않도록 마음으로 연결되는 관계가 두루 스며들길…. 그래서 우리들의 ‘다름’이 언제나 안녕하기를 소망한다. (끝)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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