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승 칼럼] 검찰·경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주의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충남 홍성경찰서의 사찰주임은 홍성군의 자유당 선거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나오라고 했다. 선거 책임자가 경찰서에 가보니 광목이 실려 있는 트럭이 두대 있었다. 사찰주임은 그에게 “이 광목들을 가져다가 자유당원이라고 쓴 완장을 만들어 선거일에 주민들이 차고 가도록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선거일 며칠 전에 서울의 치안국에서 내려왔다는 경찰 간부를 만났다. 이 경찰 간부는 홍성군의 선거를 총책임지고 내려온 것이었다. 이 일화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손재학 선생의 미출간 회고록에 나오는 것으로, 경찰이 당시 정치, 특히 선거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기 경찰의 선거 개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나오는 예를 몇가지 들어보면 이렇다. 총선이 있을 때면 경찰은 야당의 유력한 후보자를 후보 등록 기간에 이런저런 핑계로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어두었다.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거가 시작되면 야당 후보의 벽보를 경찰이 훼손하기 일쑤였다. 환경미화나 청소를 앞세워 야당 후보의 벽보가 붙어 있는 집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이를 떼도록 지시했다.
후보의 유세가 시작되면 야당 후보의 유세를 위한 마이크의 전원을 차단하여 야당 후보가 유세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야당 후보의 유세에 발전기를 빌려준 식당 주인에게는 영업정지 조처를 내렸다. 영업장 앞에 야당 후보의 선전 입간판을 세워둔 고물상에게는 영업허가를 취소시켰다. 야당 후보의 유세를 도와준 이발사에게는 위생설비 불량이라는 이유로 이발소 영업정지를 내렸다.
선거 때만이 아니었다. 경북 모 군의 경찰서 서원은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을 보고 있는 집을 방문하여 “야당지를 봤다가는 당신 아들의 군 제대가 늦어질 것”이라 협박하는가 하면, 공무원한테는 “당신은 파면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또 경찰은 야당 당원들에게는 그의 가족들을 통해 압력을 넣어 탈당을 강요하였다. 경찰서 사찰과의 경찰들은 일상적으로 야당 정치인들을 사찰하여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1950년대 이승만 정권기의 선거는 거의 경찰이 책임지고 있었다. 이승만 시대는 ‘경찰정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민주주의는 경찰정치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 경찰의 무도한 정치 개입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철퇴를 맞게 된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강학은 3·15 선거에 앞서 전국 경찰국장 회의에서 무더기 사전투표, 표의 매수, 야당 참관인 축출, 3인조 투표 등에 경찰이 앞장서도록 지시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3·15 부정선거의 사실상의 주역은 경찰이었다.
1960년 5월20일 한 신문은 사설에서 “이승만 철권 독재정치 12년을 지탱해온 바로 그 철권이 경찰이었고, 모든 선거부정과 야당탄압의 본진이 경찰이었다는 것은 이미 백일하에 폭로된 제 사건의 진상에 의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은 오래전부터 ‘경찰국가’라는 저주의 표현으로 경찰을 적대시해왔다”고 경찰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경찰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시켜 앞으로 어떠한 정권이 집권하더라도 경찰을 사병처럼 구사할 수 없게끔 제도화”해야 한다면서 ‘경찰중립화’를 주장하였다.
치안국장 이강학은 법정에서 “5·26 정치파동(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 나라의 경찰은 정치의 압력을 받아왔다. 오늘날 부정선거를 치안국에서 또는 지방국에서 했다고 하지만, 중앙집권제인 우리나라에서 상부의 명령을 어떻게 거스르겠소”라고 변명하였다. 그는 “하루빨리 경찰을 정치에서 해방시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경찰의 총수였던 그도 경찰의 정치중립화를 바란다고 말할 만큼 경찰중립화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국회는 경찰의 중립화를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으나,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고 이후 경찰중립화 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정권 시기에 경찰은 여전히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두환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군으로 진압한 뒤, 시위 진압을 위한 전투경찰까지 창설하였다. 군부정권은 전국적인 조직, 수사권, 물리력을 가진 경찰을 권력 유지를 위해 철저히 이용하였다.
경찰의 중립화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였다. 박종철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경찰중립화를 위한 여야의 논의와 입법은 더디기만 하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91년에야 내무부에서 독립 외청으로 떨어져 나온 경찰청이 출범하고, 경찰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경찰은 이를 계기로 비로소 정치적 중립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만듦으로써 경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우려가 다시 나오고 있다.
5·16 쿠데타 이후 약 30년간 이어진 독재정치를 떠받친 또 하나의 집단은 군이었다. 군부의 집권은 1979년으로 끝나야 마땅했다. 그런데 전두환 등 하나회 집단은 이제 자신들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이듬해 광주에서의 학살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군부의 집권 정당성은 이미 부정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은 7년이나 지속되었고, 선거를 통해 다시 노태우 정권으로 5년간 연장되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군의 사조직 하나회가 해체되고, 12·12에서 5·18로 이어진 군사반란의 주범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군은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정치적 중립성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약 30년 동안 한국 정치는 정당, 시민단체, 노동조합, 언론, 재벌기업, 정부의 권력기관 등이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그런대로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왔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검찰의 힘이 막강해지는 가운데,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권한 남용 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검찰은 과거 경찰과 군이 민주주의를 훼손한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항상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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