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을 막기 위한 시공간적 경로 [세상읽기]

한겨레 2024. 2. 2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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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정부가 군 병원 12곳의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지난 2월20일 오후 경북 포항에 있는 해군포항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민간인 환자가 올 것에 대비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인아│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던 한국 의료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만 같다.” 한 선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쓴 문장이다. 저 문장에 내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과 혼란, 그리고 불안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저 문장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의대에 입학한 뒤 한 선배가 우리 대학병원은 망할 거 같은데 뭐 하러 입학을 했냐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다. 대학교의 부속병원이 아닌 기업의 총수나 기업이 만든 재단의 자본으로 대형 병원이 개원하고 증축을 하던 시기였다. 작은 병원들은 다 망할 거 같다고 했다. 이후 수십년간 대학병원들도 분원을 짓고, 병원을 크게 신축했다. 병원들은 여전히 병원을 짓고 있고 이제는 실버타운까지 포함한 의료복합타운을 만들고 있다.

고난도의 수술을 위해서는 실력 좋은 의사 이외에,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규모의 경제라고나 할까, 환자 수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야 그런 수술팀을 운영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지역에는 그런 병원도, 수술을 도와줄 전문가도 없었다. 훌륭한 의사가 혼자 사명감을 가지고 지역으로 간다고 해서 그런 수술을 하고, 수술 후 처치를 하고, 환자를 돌볼 수는 없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학교에서는 한번도 배운 적 없는 낯선 이름의 주사와 수액 이름이 동네 의원에 붙어 있는 게 당연해졌다. 한국은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전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으면서 고령화 속도는 가장 빠른 나라가 되었다. 의료의 전문성이 점점 고도화되면서, 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분야 전문의 여러명이 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만큼 이전보다 훨씬 긴 교육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해졌다. 기술이 발전하면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노동집약적인 보건의료 영역에선 서비스가 필요한 환자가 갈수록 많아지고, 습득해야 하는 기술이나 지식도 늘고 다양해지면서 당연히 의사는 더 필요해졌다. 의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련 전문가들도 더 필요해졌다.

수도권과 지역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서울에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아이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매년 100만명의 암 환자들이 서울의 ‘빅5 병원’으로 몰린다고 한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료개혁이 필요하다고 했고, 현 의대 정원의 65%가 넘는 2천명 증원을 핵심으로 꼽았다.

의료 체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자원인 의사의 규모와 분포 모두 당면한 과제이고 정부가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지역 격차나 생명을 촌각으로 다루는 바이털 의사 부족 문제는 의사의 절대적인 수보다 분포가 중요할 수 있다. 의사의 공간적 분포뿐만이 아니다. 이송체계 등을 고려한 시간적 분포 역시 중요한 요소다. 반면 인구구조와 국민들의 보건의료에 대한 요구 변화에 따른 의료산업 및 기술 발전은, 분포보다는 절대적 숫자가 중요한 정책일 수 있다. 그런데 분포에 대한 정책의 구체성은 확실하지 않은 반면, 규모에 대한 정책은 매우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규모 자체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 정책이 초래할 결과와 파장의 불확실성은 매우 크다.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고려한 것 같지도 않았다.

역사 속 몇가지 우연과 많은 이들의 헌신, 희생 속에서 유지하고 있던 것이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다.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보편적 의료 보장의 나라 한국은 어찌 보면 이런 우연과 헌신이 만들어낸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는 상황일 수 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나가자 수술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바이털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했던 학생들도 수련을 포기하고 의대 교수들이 대학을 그만두기 시작한 것도 오래된 일이다.국가적 재난 상황이라는 지금 보건의료체계를 지탱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은 공공의료기관은 전체 병상의 8.8%에 그칠 뿐이다. 공교롭게도 정책이 발표된 뒤 보험회사의 주가는 급등했다. 이런 일들이 그저 우연이길 바란다. 파국을 의미하는 전조가 아니길 바란다. 이루고자 하는 결과가 같음을 확인하고 최선의 시공간적 경로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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