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민주당의 공천 학살, ‘성골 운동권’에 눌려왔던 이재명의 울분?
이재명과 ‘친문’ 격돌…‘집단 린치’ 표현도 나와
정청래 “문재인은 되고 이재명은 안되냐”며
친문의 이중성 공격…공천 싸움 살벌한 배경 시사
이번 민주당 공천은 기이할 정도로 살벌하고 낯설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학살’이란 표현을 쓸 정도의 공천 파동은 대개 보수 정당의 몫이었다. 2000년 (김윤환·이기택·조순·이수성 등의 공천 탈락으로 인한) ‘민국당 사태’, 2008년 (박근혜의 “국민도 속고 저도 속았습니다”라는 말로 촉발된) ‘친박연대’, 2016년 (유승민 공천 배제와 김무성 대표의 ‘옥새 파동’을 야기한) ‘진박(眞朴) 공천’ 모두 보수 정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2017년까지 한국 정치의 기본 지형은 ‘민주자유당 대 반(反) 민주자유당’, ‘한나라당 대 반(反) 한나라당’, ‘새누리당 대 반(反) 새누리당’으로 보수 정당이 주류고 상수였다. 민주당은 ‘DJP연합’,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진보정당과의 연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세가 부족해 연대하기도 바쁜 민주당은 공천 학살할 명분이 없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보수의 분열과 몰락은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민주당 대 반(反) 민주당’의 시대다. 민주당이 상수다.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오세훈·안철수 단일화’, 2022년 대선 ‘윤석열·안철수 단일화’,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합당’은 과거 민주당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2017년 이전까지는 이름에 ‘민(民)’이 들어간 조직은 ‘비주류’를 상징했다. ‘민주당’, ‘민노총’, ‘민변’, ‘민예총’, ‘민언련’ 등은 이젠 주류다.
토마스 칼라일의 날카로운 통찰대로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려운 게 세상 이치다. 주류가 된 순간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은 불가피하다. 일본 메이지 유신 후 벌어진 ‘세이난 전쟁’은 메이지 유신 주역 중 하나인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벌인 전쟁이다. 2차 대전 때 독일에 맞서 함께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냉전’을 치렀고, 일본에 함께 맞섰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치렀다. 배가 부른 민주당도 전리품을 두고 분열할 시간이 왔다. 운명이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공천 파동과 관련해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서 이재명으로 깃발과 상징이 계승됐다. 선거 때면 노무현 깃발, 문재인 깃발을 내세우며 친노, 친문을 자처했다. 4년 전 총선에서 친문이 아닌 국회의원 후보가 있었나. 다 문재인 이름 걸고 국회의원 당선되지 않았나. 그런데 이재명은 안 되나”며 ‘친문’의 이중성을 직격했다. 그는 “저는 노사모 출신이다. 저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국민을 사랑했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최고위원을 했다. 문재인을 지키다가 징계도 받고 컷오프 아픔도 있었다. 당시 노무현, 문재인 흔들던 정치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며 ‘이재명을 흔드는 세력’에게 분노했다.
정청래의 분노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6년 정청래 컷오프와 2018년 지방선거 경선때 이재명에 대한 ‘집단 린치’의 주역이 ‘친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민주당이 ‘이재명 당’이 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정청래 당’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성골 운동권’에 30년 넘게 눌려왔던 정청래의 울분이 바로 이재명의 울분이다. 이 싸움이 살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586 운동권 청산’은 한동훈이 아니라 이재명이 하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이재명 당’을 향한 폭주는 누구도 막아 세울 수 없다. 반명도, 이낙연 전 대표도, 정세균·김부겸 전 총리도, 문희상 전 국회의장 같은 당 원로도, 홍익표 원내대표도, 정치적 멘토로 알려진 이해찬 전 총리도, 문재인 전 대통령도 막을 수 없다. 스스로 멈출 것 같지도 않다. 이재명 대표는 “경기하다가 질 것 같으니 경기 안 하겠다, 이런 건 국민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며 “입당도 자유고 탈당도 자유”라고 했다. ‘할 테면 해보라’는 태도다.
이재명 대표는 이렇게 해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더라도 ‘확실한 이재명 당’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걸까. 과반의석은 몰라도 아마도 1당은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게 오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실린 ‘이재명 사퇴를 권함’이라는 칼럼이 대표적이다. “이재명은 민주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당 지도자로서 부적격이다. (...) 제1당을 이끌면서 주요 현안을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홀로 결정하고, 당 지도부는 물론 그와 가깝다는 의원의 조언조차 듣지 않는다. (...) 이 모든 무리수는 총선 패배의 길을 가리키고 있다. 불길한 징후를 그도 느낄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경쟁자로 여겨지는 잠정적인 당권·대권 주자가 제거되는 것만 보일 것이다. (...) 이재명은 문제 자체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이미 물 건너갔다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불길한 징후’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공천이 끝나고 대진표가 완성되면 ‘윤석열 정권 심판’ 구도가 다시 작동할 걸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손흥민과 이강인의 출동이 ‘원팀’을 무너뜨려 패배를 자초했듯 이런 분열 이후에 다시 뭉치기는 어렵다. ‘이재명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없다’는 민주당 지지층이 투표에서 이탈한다면 총선 승리는 난망하다. 민주당은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했다. 2022년 지방선거 투표율 50.9%, 2008년 총선 46.1%, 2007년 대선 63.03%, 2006년 지방선거 51.6%, 2002년 지방선거 48.9%의 낮은 투표율일 때 민주당은 참패했다. 보수 유권자는 선거 판세와 상관없이 투표장으로 가지만 민주당 지지층은 당이 분열했을 때 투표장에서 이탈했다.
과반의석을 놓치더라도 민주당이 원내 1당을 한다면 이재명 대표는 모든 비판을 잠재울 수 있다. 설사 원내 1당을 국민의힘에 내주더라도 130석 이상을 한다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민의힘에 과반의석을 내주고 120석도 못 얻는다면 책임론 공세를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의 시간이 불과 40여 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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