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내 동생, 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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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를테면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그랬던 외숙모도 어느새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팔순을 훌쩍 넘기셨다.
한사코 사양하던 아버지가 그려준 그림은 삐뚤빼뚤 아이들의 그림 같았다.
아버지가 데려왔고, 아버지가 데려갔던, 그 시절의 내 동생이 흰 종이 위에서 꼬리를 살랑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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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아버지는, 이를테면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태로웠다. 해 뜨기 전 일을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 늦은 밥상을 받았다.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었고, 한 달에 한 이틀을 쉬었다. 그 와중에도 달리기 선수를 꿈꿨던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새벽마다 둑방을 달렸다. 외로웠던 걸까. 어린 나를 끌고 다녔다. 눈꺼풀에서 잠을 떼어내지도 못한 내게 달리기는 아버지라는 폭군의 지긋지긋한 명령이요, 꿀잠과 맞바꾼 헛짓이었다.
어느 밤, 아버지가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왔다. 막 젖을 뗀 누르스름한 귀염둥이였다. 하지만 키울 데가 없었다. 주인집 문간방에 사글세 살던 우리 가족의 공간은 방 한 칸과 작은 다락, 실내라고도 실외라고도 말하기 뭣한 좁은 부엌 하나뿐이었다. 개를 방에서 키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강아지 둥지는 자연스럽게 부엌이 됐다. 다행히 연탄아궁이 옆엔 온기가 있었다. 강아지는 밤이면 밤마다 외롭다고 낑낑대고, 배고프다고 낑낑댔다.
밤 9시면 잠들어 새벽에 나가야 했던 아버지에게 그 소리는 고역이었다. 참다못해 강아지 입을 검은 고무줄로 묶었다. 아침에 풀어주면 주둥이에 고무줄 파고든 자국이 선명했는데, 언제 괴로웠냐는 듯 녀석은 신나게 꼬리를 살랑대고 내 얼굴을 핥았다. 멜롱이라고 이름 지었다. 녀석이 사람동생보다 귀여운 개동생이 되는 건 삽시간이었다. 학교를 파하면 강아지랑 놀고 싶어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는 새벽 달리기에 멜롱이를 데려가기 시작했고, 개와 달리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나는 깨달았다. 서울 용답동에서 출발해 장안평을 지나 군자교를 건너 화양동 둑방까지 꽤 먼 거리를 날마다 달렸다.
어느 날 개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솔직했다. 어머니가 거들었다. “화양동 외숙모가 허리를 다쳐 수술했다. 해줄 게 없어 고민했는데, 개고기가 회복에 좋다기에 멜롱이를 갖다줬다.” 나는 발광했다. 울고불고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세수하는데 누군가 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멜롱이였다. 외삼촌 집에서 탈출해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새벽마다 함께 뛴 길이었다. 나와 동생은 멜롱이를 끌어안고 울며 학교도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개근상을 못 받는다는 협박에 굴복했다. 학교를 다녀오니 멜롱이는 없었다. 외숙모가 무사히 회복하신 걸 다행이라 여겨야겠지만, 오랜 시간 내겐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랬던 외숙모도 어느새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팔순을 훌쩍 넘기셨다.
얼마 전 아버지께 대뜸 물었다. 그때 꼭 그랬어야 했나요?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지금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개 그림을 한 장 그려달라 부탁했다. 한사코 사양하던 아버지가 그려준 그림은 삐뚤빼뚤 아이들의 그림 같았다. 아버지가 데려왔고, 아버지가 데려갔던, 그 시절의 내 동생이 흰 종이 위에서 꼬리를 살랑댔다.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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