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없는 살인사건' 수사처럼...고대 인류의 예술을 연구하는 방법

입력 2024. 2. 29. 10: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1> 고대인들이 남긴 추상화의 비밀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선사시대의 그림 연구는 ‘시신 없는 살인’ 재판과 닮았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누군가 사라졌고 용의자에게 분명한 범행동기가 있어도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법정에서 "당신이 범인”이라고 선고할 수 없다.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에서도 명백한 증거로 삼을 문자가 없다. 문자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에 대한 '가설'이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강력한 정황증거와 상황증거, 그리고 최소한의 과학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간접증거는 있다. 까마득한 세월의 풍화를 겪고도 살아남은 동굴벽화, 바위그림(암벽화·암각화), 그리고 우연한 조건 덕에 형태 유지가 가능했던 유물이다. 다행히 최근 활발해진 과학적 고고학 연구로 선사시대에 대한 새로운 직접증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타이틀 매치

2021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리앙 테동게 동굴의 돼지 그림의 연대측정이 약 4만5,500년 전으로 밝혀지면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 됐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을 떠올릴 때 거대한 붉은 들소가 그려진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1만7,000년 전)나 생동감 있게 뛰어다니는 야생마가 그려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2만2,000년 전)를 꼽는다. 그러나 1994년 프랑스 쇼베 동굴의 사실적인 동물그림이 3만6,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면서 순위가 바뀌었다.

2012년 우라늄 연대측정법을 통해 스페인 엘 카스틸로 동굴벽화의 그림 하나가 4만1,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새로운 챔피언에 올랐다. 동굴벽화들이 주로 유럽에 있다는 이유로 인류 예술의 기원이 유럽이었다는 인식이 강할 때였다. 2014년엔 유럽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동굴벽화가 4만 년 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2018년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동굴에서도 4만 년 전 그림이 발견됐다. 2019년에는 술라웨시섬 블루 시퐁 동굴의 그림이 4만3,9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1위 타이틀이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넘어갔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2021년 술라웨시섬 리앙 테동게 동굴의 돼지 그림이 우라늄 동위원소 측정 결과 4만5,5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공식화됐다. 앞으로도 순위는 바뀌겠지만,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예술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시각 이미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문자를 몰랐던 고대인들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존재이고, 현대인은 많은 것을 깨우친 현명한 존재일까. 고대와 중세의 투박한 그림 표현은 르네상스를 거치며 발전했고, 인상주의를 기점으로 현대미술의 추상화로 진화했다. 흔히 그림이라고 하면 사람, 자연, 사물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구상화를 떠올린다. 구상화의 반대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추상화라 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추상화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과연 추상화는 구상화의 진화 또는 진보된 형태인 걸까.

시각 처리의 초기 단계를 나타내는 그림.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와 ‘그것이 무엇인가’는 서로 다른 경로로 처리된다. 구상미술에 비해 추상미술을 볼 때 하향처리 과정이 더 활발히 일어난다. 프시케의숲 제공

최근 구상화와 추상화가 우리 뇌에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를 미술과 연결해 매우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책이 있다. 치매와 기억상실 연구로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뇌과학자 에릭 캔델은 책 ‘어쩐지 미술에서 과학이 보인다'(프시케의숲 발행)에서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에 대한 뇌 반응을 설명했다.

뇌는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두 가지 경로로 이동시킨다. '이것이 얼굴이다' 하고 인식하는 과정은 뇌의 위쪽 경로(상향 처리)로 이동하고, '이것은 누구의 어떤 얼굴이다'라고 파악하는 것은 아래쪽 경로(하향 처리)를 통해 작동한다. 하향 처리에 문제가 생기면 얼굴 자체는 인식하지만 누구의 얼굴인지 모르는 안면인식장애가 생긴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추상 이미지는 하향 처리를 통해 뇌의 기억 저장소에 도달하며, 개인마다 다른 기억, 감정, 상상, 창의성을 촉발한다. 캔델은 "추상적 이미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가르침"이라고 규정한다.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의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은 뇌의 위쪽과 아래쪽 경로로 움직이며 학습되고 기억된 것으로 추정된다. 돼지, 소, 말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그 근거다. 인류는 훗날 모호하고 불확실한 동심원, 마름모, 직선과 점도 그렸다. 긴 시간을 거쳐 인류는 직선과 곡선으로만 이뤄진 가장 추상적인 이미지, 즉 문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왜 바위그림을 그렸나

추상적 이미지는 문자의 원시적 형태로, 인간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래서 미술사학자들은 선사시대 유물에 그려진 추상적 이미지 앞에서 고민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 바위그림에는 뜻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온갖 기하학적 이미지가 많다. 이들을 선사시대의 문자로 볼지, 그림(미술)의 역사에 포함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바위그림은 연대추정에 필요한 성분이 부족하고 외부에 노출된 채 풍화되거나 훼손된 경우가 많아서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지난 2월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를 통해 선사시대 바위그림의 탄소 연대 측정에 최초로 성공했다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됐다. 논문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한 암벽의 빗살무늬 그림은 8,200년 전에 그려졌는데 이와 동일한 형태의 그림들이 3,000년 동안 약 130세대에 걸쳐 반복해 그려졌다. 논문 작성에 참여한 라미로 바르베레나는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연대가 밝혀진 점도 흥미롭지만 3,0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같은 그림을 반복해 그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 그림의 뜻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혹독한 기후를 견뎌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구전을 통해 보존됐다는 것이 연구팀의 추정이다. 바르베레나는 "여러 세대에 걸친 그림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 소통이 이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소재 암벽의 빗살무늬 그림에서 추출한 안료의 연대측정 결과 8,2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그림들이 3,000년 동안 약 130세대에 걸쳐 반복해서 그려졌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발췌

인류는 오래전부터 지구 곳곳에서 예술을 하며 생존했다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이 고대인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니, 무슨 말일까. 이와 관련해 문화인류학자 엘렌 디사나야케의 설명이 도움이 된다. 그의 책 '미학적 인간'(연암서가 발행)에 따르면, 20만 년 전에 출현한 현생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를 디사나야케는 '예술하는 행동'에 있다고 봤다. 그는 예술을 단순히 인간 지능의 증거 또는 문화발전의 척도로 분석하는 인식을 비판했다. ‘예술하는 행동’은 인류의 본능적 행동이자 생존의 힘이었다.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고대인들이 들소를 그린 게 아니며, 구체적으로 묘사할 줄 몰라서 동그라미와 직선을 그린 게 아니다. 사용 언어가 서로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듯이 예술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암각화 보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
'천전리 각석 시측조사보고서(장석호, 2003)'에 수록된 울산 천전리 암각화 실측도면, 국보 제147호.

한국에는 암각화가 많다. 지난 1월 문화재청은 '울산 울주 반구천의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그림으로 유명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추상적인 기하학 문양들과 신라인들의 글씨가 남겨진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묶어 '반구천의 암각화'라고 부른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 초식동물과 다양한 인물이 그려진 약 6,000년 전의 구상화다. 천전리 암각화는 동심원과 마름모가 가득한 추상화다.

2018년 콜롬비아 치리비케테 국립공원 암벽화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깊은 아마존 밀림의 12km 길이 암벽에 무려 7만 점의 그림이 있다. 접근이 어려웠다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활발한 연구가 시작됐다. 2만 년 전의 암벽화로 추정되는 이곳에 천전리 암각화의 문양과 동일한 형태가 있음이 확인된 것도 최근이다. 치리비케테 암벽화는 전체 이미지 파악에만 1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동심원과 마름모꼴 형태의 추상적 이미지(오른쪽 사진)와 유사한 형태가 2만 년 전부터 그려졌다는 아마존 밀림의 치리비케테 암벽화에서도 확인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암각화는 위태로운 처지다. 반구대 암각화는 대구, 울산의 식수·생활용수 공급을 위해 건설한 인근 사연댐으로 인해 매년 약 6개월을 물에 잠겨 있는 탓에 상당 부분 훼손됐다. '유산 보존이냐 물 공급이냐'를 둘러싼 갈등이 수십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경북 포항의 ‘칠포리 암각화’도 훼손 우려가 있다. 칠포리 암각화엔 청동검 손잡이를 닮아서 ‘검파문’이라 부르는 문양이 있는데, 한국에서만 발견된 것이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하다. 그러나 지난해 낙서로 훼손됐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이 지역을 관통하는 새로운 국도 공사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한국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직접증거다. 더 늦기 전에 훼손되고 있는 우리 암석화 보존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미술교육자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