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 구분 없던 여성 생활축구 차별, ‘40대 병풍’이 뛰었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원 배지를 단 여성 국회의원은 18.5%다. 지난해 매출액 상위 100개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6%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비주류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보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여성들을 소개한다.
검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2명의 여성이 지난 8일 축구공을 하나씩 들고 서울의 한 풋살장에 섰다.
“기술 좀 제대로 보여줘 봐.” 신혜미씨의 요청에 양수안나씨가 능숙하게 공을 리프팅했다. “오!” 신씨의 탄성에 양씨는 “이 정도로 뭘”이라며 공을 튀겼다. 두 사람은 은퇴한 여성 선수들이 여성들에게 운동을 알려주는 사회적기업 ‘위밋업 스포츠’의 대표다.
학창시절 축구 선수로 활동하던 두 사람은 신 대표가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겪고, 양 대표는 실업팀이 해체되면서 은퇴하게 되면서 ‘은퇴 선수’ ‘여성’이란 키워드를 교집합으로 의기투합했다.
—축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신) “축구에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여자애들이 남자애들한테 끼어서 축구 경기를 하면 희한하게 봤었다. 당시 여성들은 스포츠, 특히 구기 종목을 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다 입학한 중학교에 여자 축구부가 생겼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여자축구가 종목으로 채택된 뒤 한국에서도 정책적으로 여자 축구팀을 만들 때였다. 운동신경이 좋다 보니까 체육 선생님에게 불려가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양)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동네에서 남자애들이랑 어울려서 공을 차곤 했다. 그러다 위례 상업고등학교(현 서울 동산고등학교) 여자축구팀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뉴스를 듣게 됐다. 여자 축구팀이 있다니, 놀라웠다. 서울 현대고등학교에 여자 축구부가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테스트를 받으러 가 뽑혔다.”
—두 사람은 어디서 처음 만나게 된 건가.
신) “나는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다리 하나만 건너면 양 대표네 학교였다. 상대 팀이었지만 서로 편지도 주고 받으며 친하게 지냈다. 경쟁 관계는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양 대표네 학교는 잘했다.” (웃음)
양) “창단 1년 뒤인 2학년 때 4강, 3학년 대회에서 준우승했다. 그러다 신 대표와 같은 대학 축구부에 진학하면서 더 가까워졌다.”
—축구는 재미있었나.
양) “나는 당시 철이 없어서 축구도 좋았고, 노는 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웃음)
신) “나도 축구가 생소했지만, 내가 축구를 하는 걸 보는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까지 짧으니까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더라. 축구팀에 머리 긴 친구는 한명도 없었다. 지도자들도 남자라, 남자 선수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쳤다. “말 안 들어? 머리 밀고 와”라는 식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고민이 많았다. 축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실업팀에 간다면 몇 년이나 할 수 있을까, 은퇴하면 뭐하지 같은 고민이었다.”
—은퇴한 축구 선수들을 봤을 때 미래가 안 보였던 건가.
신) “그렇다. 조언해 줄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일부는 은퇴한 뒤 운이 좋거나 코치님 눈에 잘 들어 보조 코치로 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은퇴한 여성 축구 선수들이 (강습) 등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양) “여자 축구팀이 있는 대학은 6곳이었는데, 실업팀은 두 곳뿐이었으니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긴 했다.”
—은퇴한 여자 선수들이 갈 곳이 적은 이유는 뭔가.
신) “단적으로, 남자 선수가 은퇴하면, 남자팀이나 여자팀 지도자로 갈 수 있다. 은퇴한 여자 선수는 99.9999% 남자팀에 가지 못한다. 엘리트 육성 학교도 마찬가지다. 국가대표 여자 종목들의 지도자만 해도 대부분 남자다. 여자 선수 중에도 은퇴 뒤 지도자 생활 잘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가대표 감독으론 안 뽑아 준다. 여자 감독들에게는 못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WK리그 8개 팀 중에 여자 감독이 5명이고, 여자 심판이 늘고 있는 건 나아진 점이다.”
—어쩌다 위밋업 스포츠를 만들게 된 건가.
양) “27살께 실업팀이 해체되면서 강제로 은퇴하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여성단체 활동가들에게 일회성으로 축구 교육을 할 기회가 있었다. 축구 복장을 갖추지도 않은 상태로 축구 할 줄도 모르면서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더라. ‘잘하지도 못하면서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 싶어서 머리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쩌면 여성들은 운동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미래도 안 보이고, 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스포츠 산업 전공으로 대학원엘 갔다. 박사까지 마쳤는데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경험했다. 대학원 동기인 남편은 강의 자리를 얻는데 나한테까진 잘 안 오더라. 교수님도 “○○(남편)한테 자리 줬는데, 너한테까진 안 줘도 되잖아” 하더라. 나를 독립적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남편과 묶는 게 기분 나빴다. 나는 불평등에 관심이 있었고, 양 대표는 운동장을 뺏긴 여성들에게 관심이 있던 차에 한 번 해보자 했던 거다.”
—여성들이 운동장을 빼앗겼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양) “생활체육 여성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30대~70대까지 연령대별로 대회가 따로 있다. 근데 여자는 ‘여성부’ 하나다. 팀별로 연령대별 출전 선수 인원수 제한이 있다. 예를 들어 20대는 몇 명, 30대는 몇 명 이런 식이다. 그러다 보니 40대 이상인 언니들은 경기를 잘 못 뛰고 병풍이 되는 거다. 여성들도 연령을 나눠 경기하자고 축구협회 쪽에 요구했는데 잘 안 됐다. 화가 나서 2018년에 신 대표와 사비 내서 40대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한 ‘언니들의 축구대회’를 만들게 됐다. 대회에 출전한 언니들이 우리 손을 잡으면서 너무 고맙다고 하더라.”
신) “‘최고 언니 상’도 만들었고, 팀별로 나이를 합산해서 높은 팀에 가산점을 주기도 했다. 나이 많은 게 민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후에 정식으로 ‘위밋업 스포츠’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은퇴한 여성 선수에겐 일자리를 제공하고, 여성들에겐 스포츠 경험을 제공하는 플랫폼이었다. 처음엔 3년만 버텨 보자고 했는데, 벌써 6년이나 됐다.”
—위밋업이 처음에는 언니들이 뛸 운동장이 없다, 여기에서 시작한 거였네.
신) “복합적이었다. 언니들이 뛸 공간이 없는 것에도, 운동한 여성들이 지도자로서 설 자리가 없는 것 등에도 문제의식이 있었다.”
—요즘 운동 플랫폼이 많다. 위밋업의 차별점은.
양) “처음엔 주짓수로 시작했고, 현재는 농구·축구·럭비·주짓수 등 10여개 종목을 가르친다. 강사들은 꼭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받아야 한다. 작년에도 8차례 진행했다. 우리 강사들은 “날씬해지려고 운동하냐”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차별점이다. 장애 여성의 스포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수어 교육을 받기도 했다. 우리와 유사한 업체들이 많아졌지만 지향점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신) “2021년부터는 나이키, 초록우산 재단과 함께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의 스포츠 경험을 늘리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위밋업이 여성의 스포츠 경험 진입장벽을 낮췄다고 생각한다.”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나.
양)“하고 싶은 것도, 교육해달라는 요청도 많았는데 장소 대관이 쉽지 않았다. 이미 장기대관 등이 꽉 찬 상태라서 틈새를 찾기 어려웠다. 강사들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려면 클래스가 많이 열려야 하는데, 장소 대관이 매번 걸렸다.”
—6년을 운영한 거면 수익 구조는 괜찮은 건가.
양)“사업 모델로 보면 수익구조가 좋지는 않다고 한다. 클래스를 열면, 장소비, 강사료, 세금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구조가 아니다. 그동안 각자 외부 수업 등 하면서 운영비를 충당했다. 우리가 월급을 받기 시작한 건 작년 1월부터다.”
—축구를 새로 접하는 여성들이 최근 늘어난 건 좋은 조짐이지 않나.
신) “저변이 넓어져서 좋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반짝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면 여자축구연맹 등에서 여성 생활체육 활성화 등 방안을 만들어 잘 끌고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걱정이다. 생활체육이 활성화돼야 엘리트 스포츠도 발전한다. 은퇴 선수들이 모두 엘리트 지도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엔 생활체육 지도자가 90%다. 생활체육팀이 많아져야 은퇴 선수들도 살아가는데 연맹이 방관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의 감독들도 모두 남성이지 않나.”
—위밋업의 가장 큰 고민은.
양)“지속 가능성이다. 이를 위해선 안정적인 장소 확보가 필수다. 그래서 은퇴 선수들에겐 일자리와 교육받을 수 있는 장이 되고, 여성들에겐 다양한 종목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인 복합체육관을 만들고 싶다. 이름은 ‘언니네 체육관’이다.”
신) “나머지 하나는 동남아시아 스포츠 교육 투어를 하고 싶다. 빈곤국가일수록 생활체육이 발전하기 어렵고, 특히 여자아이들은 더 소외된다. 올겨울에 짧게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친명 유튜브 말대로 공천이’…커지는 이재명 사천 논란
- 이정섭 검사 수사는 지지부진…탄핵심판에선 ‘수사중’ 탓 공전
- [현장] 사람 보이면 ‘꺅꺅’, 동물들은 미쳐간다
- 오세훈의 ‘좌건희 우승만’
- 국민의힘 지역구 ‘현역 불패’ 깨져…장예찬·김희정·권영진 본선 티켓
- 김제동의 맛깔난 역사 토크쇼…“언제든 청하세요”
- 불에 손 넣고도 태연…그런 결기, 일제 겨눈 30살 송학선의 삶
- 쿠팡, 14년 만에 연간 흑자 냈다는데…과로사·블랙리스트는요?
- 장기체류 외국인 189만명…인구위기에 이민·정착 지원 ‘필수’
- ‘김건희 리스크’ 회피하는 한동훈...“본인도 부끄러울 것” [막전막후 총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