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좌건희 우승만’
이세영 | 전국부장
구차할수록 꼬이고 늘어지는 게 사람의 말이다. 이승만기념관과 관련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27일 기자설명회에서 한 발언이 그 전형이다.
“이곳(송현광장)에 이건희미술관(에 이어) 이승만기념관이 들어간다는 논의가 시작되니, 개방감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데, 두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이나 층수를 정확히 알면 그런 걱정은 불식될 거다. 송현광장은 굉장히 넓다. 건물 두 개가 들어가도 전체의 5분의 1 정도다. 그것도 이건희미술관은 동쪽 끝에, 이승만기념관은 균형 잡힌 배치를 위해 서쪽 끝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광장) 가운데 서서 보면 개방감은 유지된다. (중략) ‘비우는 디자인’이라는 서울시 원칙은 조금 가려지겠지만, 뒤에 있는 북악산 정도는 다 볼 수 있는 개방감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오해가 풀렸으면 한다.”
질문 취지는 ‘광장에 이건희미술관 외엔 아무것도 못 짓게 하겠다고선 왜 말을 바꾸느냐’는 것인데, 돌아온 건 ‘이승만기념관을 지어도 개방감이 유지되니 원칙을 훼손한 게 아니’라는 답변이다. ‘아무것도 안 짓겠다’는 구체적 약속을 ‘개방감을 유지한다’는 추상적 선언으로 바꿔치기한 뒤 ‘내 입장이 변했다는 것은 기자의 오해’라고 눙치는 식이다. 그러나 오 시장이 지난해 5월3일 송현광장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주제관 개장식에서 한 말은 너무도 투명하고 촘촘해 바늘 끝만큼의 오해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공간을 비워놓은 상태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런데) 이건희미술관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많은 분이 즐길 수 있는 컬렉션 외에는 어떤 시설도 들어올 수 없는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비워놓겠다는 다짐을 분명하게 밝힌다.”
정치인 오세훈이 1년도 안 돼 생각과 말을 바꾼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움’을 강조해온 그의 도시디자인 철학이 과시용 말장난이 아니었다면, 송현광장과 관련한 그의 태도 변화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일 개연성이 크다. 오세훈의 꿈은 누구나 알듯 차기 대통령이다. 그 꿈의 일차적 실현 여부는 여권의 대선 경쟁 구도와 보수진영 내 여론 지형에 달렸다. 그런데 이 두 영역에서 1년 새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하나가 이념적 보수색을 강화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부상이라면, 다른 하나는 보수진영에 열병처럼 확산되는 ‘이승만 띄우기’다.
오세훈의 타협은 그가 올해 들어 페이스북에 쓴 일련의 글에서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국운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영웅은 이제 외롭지 않습니다’) 앞서 한 유력 보수지 논설위원은 오 시장을 겨냥한 기명 칼럼에서 “‘보수의 정체성이 약하고 좌고우면한다’는 일각의 의구심을 떨칠 호기”라며 ‘송현동 기념관’에 대한 결단을 압박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경복궁 옆 시유지’ 제공을 검토할 만큼 이승만 선양에 적극적인 서울시장은 4·19 이후엔 오 시장이 유일하다. 심지어 그는 한 원로 배우가 기념관 건립에 쓰라며 기부 의사를 밝힌 강동구의 4천평 부지를 “너무 외진 곳”이라 깎아내리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송현광장=최적지’ 여론의 밑자락을 까는 데 열심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여러 면에서 5, 6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태선을 떠올리게 한다.
김태선은 재임 기간(1951~1956년)이 비교적 길었음에도 서울시사에서 그 이름이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언급되는 것은 이승만과 관련됐을 때뿐이다. 재임 시절 그는 ‘동양 최대’라던 이승만 동상이 남산 조선신궁 터에 들어서는 것을 적극 지원했고,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서울 대신 다른 이름을 짓자’는 이승만의 제안에 따라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를 꾸린 뒤 수도 개명의 총대를 멨다. 위원회가 마지막까지 밀어붙인 서울의 새 이름은 ‘우남’(이승만의 호)이었다.
정치인의 말과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다만 바뀐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책임이 정치인에겐 뒤따른다. 대중은 말 바꾸는 정치인보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제 오류를 인정 않고 타인에게 책임 돌리는 정치인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 오 시장은 말 바꾼 사실을 부인할 뿐 아니라, 말이 바뀌었다는 지적 앞에서 대중의 이해 부족을 탓한다. 이런 식이면 ‘디자인 감각 남달랐던’ 앞서간 서울시장이 아니라, ‘이승만 선양에 몰빵했던’ 그저 그런 ‘김태선류’로 기억될 뿐이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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