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오늘 하루는 조명을 받아도 괜찮아요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2024. 2.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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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보게 된 후배 결혼식, 신랑·신부 부탁은 “부모님께 조명을…”
리허설 때 양가 어머님 “세상 살면서 이런 조명 받아본 적 없어요”
자식 잘되라며 편지 읽은 두 분… 세상서 가장 아름다운 조명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후배 배우가 결혼식을 한다며 찾아왔다. 사회를 봐달라고 했다. 이왕이면 제대로 도와주고 싶어서 결혼식 대본까지 맡았다. 예식장에 기본으로 정리된 대본이 있었지만 공연을 하는 배우라서 공연처럼 진행하고 싶었다. 결혼식 몇 달 전부터 정기적으로 만나서 대본을 썼다. 신랑 신부 모두 공통된 소원이 있었다. 양가 부모님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기에 자신들보다 부모님들이 더 빛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소원이었다.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모았다. 신랑 신부가 처음에 나란히 손을 잡고 입장을 한다. 그 후에 양가 부모님들도 나란히 손을 잡고 신랑신부처럼 행진으로 입장을 한다. 두 어머님께서 함께 단상으로 올라와 편지를 읽는다. 신랑 어머님은 신부에게, 신부 어머님은 신랑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본이 잘 정리되었고 결혼식 당일에 리허설을 했다. 리허설이 순탄하게 잘 진행되었고, 어머님들께서 등장하는 순서가 되었다. 두 분을 모시러 갔더니 놀랍게도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떨고 계셨다. 가까스로 일어나 몇 걸음 걸어오시더니, 청심환을 드시겠다며 어디론가 달려가셨다.

몇 분 후 다시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단상 위에 조명이 켜졌다. 두 분이 조명 안으로 들어와 편지를 읽으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그 조명 바깥에서 한동안 빛을 구경하고 계셨다. 어색한 걸음으로 조명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동안 마른 침만 삼키다가 천천히 편지를 꺼내셨다. 두 분 모두 편지를 꺼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서 계속 고개만 숙이고 계셨다. 나는 분위기를 풀어드리려고, 오늘 하루만큼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멋지게 하시면 된다고 말했다. 두 어머님 중 한 분께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직하게 한 말씀을 하셨다. “미안해요.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빛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마음속에서 깊은 울컥함이 밀려왔다. 나는 공연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무대의 세상에 익숙했다. 무대 위에서는 누군가가 조명을 받고, 많은 이가 누군가를 주목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집중해준다. 하지만 두 어머님께는 그 밝은 빛이, 수많은 사람들이 두 분을 주목하고, 두 분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이 처음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 시간을 두 분의 인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님들, 긴장하셔도 괜찮습니다. 신랑 신부가 두 분의 손을 잡고 함께 단상으로 올라갈게요. 조명은 처음부터 켜지 않을게요. 두 분이 편한 자리에 서시면, 그때 조명을 켤게요. 조명 안에서는 꼭 어딘가를 보려고 애쓰시지 않아도 돼요.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바라볼 거예요. 두 분께서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두 분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오늘 하루만큼은 조명을 받아도 괜찮아요.”

결혼식이 시작되고, 마침내 두 분의 순서가 왔다. 놀랍게도 두 분은 신랑 신부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두 분이 함께 손을 꼭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발맞춰서 행진하듯 단상 위로 올라오셨다. 조명이 켜졌다. 두 분은 그 밝은 빛에 자신들의 얼굴을 밝히지 않았다. 가지고 온 편지를 밝게 비췄다. 밝게 비춰진 편지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인생에서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밝은 조명 안에서도, 두 분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내는 이야기만을 밝히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목이었다. 하객들의 박수가 그 어느 순간보다 크고 길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두 어머님도 박수를 치셨다. 자신들을 향한 박수가 아니었다. 신랑 어머님은 신부 어머님을 향해서, 신부 어머님은 신랑 어머님을 향해서, 서로가 서로를 큰 박수 소리로 빛내주고 있었다. 인공의 조명을 넘어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눈부신 조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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