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이야기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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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서울 아시안게임이 성황리에 마무리될 무렵 세상에 없던 예술작품이 선을 보였다.
기획전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는 남인도의 불교미술을 소개한다.
인도의 자연은 아름다운 조각이 가득한 스투파의 숲을 이뤘고 또 대자연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낳았다.
인도의 숲이 준 선물을 키플링도 잊지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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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서울 아시안게임이 성황리에 마무리될 무렵 세상에 없던 예술작품이 선을 보였다.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서울과 뉴욕, 도쿄를 위성으로 연결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주 오페라 버라이어티쇼'를 펼쳐냈다. 작품의 제목은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이다.
'키플링'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년)을 말한다. 키플링은 당시 영국 식민지인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짧은 시절을 보낸 뒤 본국인 영국에서 수학했다.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인도로 돌아와 신문기자로 일하며 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 그간의 성과를 발판으로 1889년 인도를 떠나 미국, 영국으로 이주했고 계속 여러 작품을 발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07년에는 영어 저작으론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위원회는 "뛰어난 관찰력, 남다른 상상력, 샘 솟는 영감에 더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작가들을 특징짓는 탁월한 서술능력"을 고려해 선정했다고 밝혔다. 1889년 키플링은 이런 시를 썼다.
'오, 동쪽은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이니 결코 그 둘은 만나지 않으리. 지구와 하늘이 곧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석 앞에 서게 될 때까지.'
키플링은 '제국의 시인'으로서 영국의 확장과 식민지배를 옹호했다. 백인이 유색인종을 다스려 문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백인의 사명'(The White Man's Burden·직역해서 '백인의 짐'이라고도 한다)도 그의 시 제목에서 나온 말이다. 백남준의 '바이 바이 키플링'은 여기에 대한 화답이다. 백남준은 키스 해링, 사카모토 류이치, 황병기, 이선옥 등 동서양 여러 아티스트의 실연영상을 실시간 위성방송으로 송출해 동양과 서양은 공존하며 화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며칠 전 박물관의 전시를 보며 키플링의 대표작 '정글북'이 떠올랐다. 기획전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는 남인도의 불교미술을 소개한다. 숲속인 듯 녹색으로 연출된 전시실로 들어서면 여러 석상이 펼쳐진다. 불상이 없던 시대의 불교조각은 석가모니의 모습 대신 여러 상상과 상징이 그 자리를 메웠다. 끝 없이 이어진 연꽃, 그리고 잎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정령, 악어를 닮은 상상의 동물 마카라 등등. 여기에 석가모니와 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탑, '스투파'가 또 하나의 숲을 이룬다. 늑대 가족과 정글족이 살았던 시오니 언덕 정글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기둥 위 용맹한 사자 석상은 온몸을 던져 모글리를 구해낸 바기라(검은 표범)를, 불법을 수호하는 뱀 조각은 원숭이 무리와 싸움에서 강력한 힘과 최면술로 결정적 승리를 안겨준 카(뱀)를 연상케 한다.
인도의 자연은 아름다운 조각이 가득한 스투파의 숲을 이뤘고 또 대자연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낳았다. 키플링의 문학적 성과는 인도라는 토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36년 키플링이 숨지자 시인 김광섭은 추도 기고문에서 '영국인이 보지 못하던 세계를 문채(文彩) 있는 문장으로 흥미 있게 이야기해주는 작가'라고 평했다. '정글의 일부지만 정글의 일부가 아니야'라는 바기라의 대사처럼, 인도의 숲은 이 외국인 작가에게도 영감을 줬다. 훗날 '열혈 제국주의자'란 비판까지 받았음에도 그의 '정글북'이 여전히 모두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인도가 준 선물 덕분일 것이다. 동쪽과 서쪽이 만나지 못한다던 그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두 강인한 사람이 마주 서게 되면, 그들이 지구 끝에서 온 들, 동쪽이나 서쪽, 종족이나 태생은 중요치 않네!'
인도의 숲이 준 선물을 키플링도 잊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실 이 시의 제목은 '동과 서의 발라드'(The Ballad of East and West)다. 연휴를 맞아 이야기 가득한 '스투파의 숲'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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