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단 앞두고 치솟는 이집트 물가… ‘식량 사재기’에 ‘골드 러시’까지[글로벌 현장을 가다]
18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흘란(환영) 라마단’ 먹거리 장터 행사장. 이슬람 금식성월인 라마단을 앞두고 해마다 이집트 정부가 주최해 온 이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알리 알모셀히 공급·내부무역부 장관은 이날 성난 군중으로부터 “당장 여기를 떠나라”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경호원과 수행원들이 군중을 비집고 장관이 지나갈 길을 확보하려 했으나, 장관은 한참 동안 인파에 갇혀 난처해하다가 겨우 빠져나갔다.
이날 행사에는 라마단을 앞두고 정부가 저렴한 가격에 식료품을 제공해 최근 고물가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려는 취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정부 인사가 나타나자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역효과를 낳은 것. 한 시민은 “며칠만 지나도 무섭게 물가가 오르는 데다 라마단 장터에 와도 행사장 바깥에 있는 일반 상점과 가격 차이도 별로 없었다”며 “고물가에 좌절감을 느끼던 사람들이 마침 나타난 장관을 보고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은 소셜미디어 등에서 빠르게 퍼지며 “무능하고 부패한 이집트 정치인들은 물러나야 한다”는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고물가에 ‘#미친가격’ 유행
최근 이집트는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는 먹거리와 생필품 가격에 정부에 대한 원성도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3연임에 성공한 뒤로 물가 상승률이 다소 완화됐다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
게다가 이집트 기준으로 다음 달 10일 시작되는 라마단은 치명적인 ‘트리거(방아쇠)’가 됐다. 통상 라마단을 앞두고 식량을 비축해 놓기 때문에 언제나 이맘때면 물가가 10% 안팎 상승했다. 안 그래도 고공비행하던 물가가 더 하늘로 솟구쳐 버린 셈이다. 하지만 별다른 정부 대책이 나오질 않자 시민들은 관련 장관 등 정부 관료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하루만 지나도 가격이 뛰다 보니 최근 식량 사재기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21일 찾은 카이로 교외의 레합 전통시장에선 라마단을 약 2주 앞두고 식료품들을 말 그대로 ‘쓸어담는’ 이들이 가득했다. 사람이 적은 편인 평일 오전 시간임에도 점원이 새 과일을 채워 넣자마자 10여 명이 달려와 빠르게 상품을 챙겨 넣었다. 한 시장 상인은 “아무래도 빵과 과일, 견과류, 대추야자 등 라마단 기간에 먹는 간단한 먹을거리가 사재기의 가장 큰 표적들”이라고 귀띔했다.
라마단 기간엔 해가 뜬 낮에는 일절 금식이지만, 해가 진 뒤엔 주로 가족들이 모여 만찬을 즐긴다. 이웃들도 초대해 여러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즐기는 문화가 보편적이라 오히려 평소보다 식품 소비량이 늘어난다. 게다가 일부 상점들은 라마단 기간에 문을 닫는 경우도 많아 이슬람권 국가에선 전통적으로 라마단을 앞두고 식량을 비축한다.
이날 전통시장을 찾은 네할 마흐무드 씨는 “며칠만 지나도 상품의 가격이 달라지니 하루라도 먹거리를 빨리 사놔야 그나마 덜 손해인데, 이미 늦게 온 거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화 중에도 대추야자를 쉼없이 주워 담던 그는 “라다만 물가를 감안해도 올해는 너무 심한 지경”이라고 말했다.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가말 씨도 “주변 상점들도 며칠에 한 번씩 새 가격표를 붙이고 있다”며 “손님들은 ‘가격이 또 올랐냐’며 불만을 터뜨리지만 상인들도 들여오는 가격이 계속 오르니 어쩔 수가 없다”고 답답해했다.
이집트 매체 알아흐람은 “물가 상승이 멈추지 않자 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 ‘#미친가격’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가격이 오른 물품을 게재하는 게 이집트 청년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며 “이집트 TV 토크쇼는 물론이고 가족 모임 등에서 살인적인 물가 얘기를 빼놓고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라고 전했다.
외화 기근에 전쟁까지 ‘이중고’
이집트 고물가는 수치로 봐도 심각하다. 최근 중앙공공통계청(CAPMAS)이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이집트의 물가는 1년 전인 2022년 12월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뛰어버렸다. 곡물·빵은 44.5%, 유제품·치즈류는 55.4%, 기름류는 27.9%나 증가했다. 심지어 과일이나 채소 등은 평균 60.1%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집트가 이렇게까지 고물가에 휘청이는 이유는 뭘까. 일단은 만성적인 외화 보유액 부족으로 경제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중앙은행에 따르면 이집트 외환 보유액은 2022년 2월 기준 409억 달러(약 53조3131억 원)로 그리 나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이 잇따르며 외국 투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같은 해 8월까지 외환 보유액이 331억4000만 달러까지 떨어졌을 정도다. 지난해부터 외화 유출을 막고자 중앙은행이 달러 해외 송금을 통제하는 등 강력한 규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특히 ‘두 개의 전쟁’은 이집트 밥상 물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집트는 세계 최대의 밀 소비국으로 1년에 평균 1800만 t(톤)을 먹어치운다. 이 중 1000만∼1200만 t을 수입에 의존하는데, 수입량의 약 8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차지한다.
전쟁 초기엔 기존의 곡물 수출입을 건드리지 않는 ‘흑해 곡물협정’이 유지됐으나 지난해 러시아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이집트 및 중동 지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13년째 레합 시장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아흐디 씨는 “실제로 조금이라도 수입 원료나 원자재가 포함돼 있는 제품은 최근 가격이 더 가파르게 뛰었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발발한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은 그로기 상태에 빠진 이집트를 다운시키는 결정타나 다름없었다. 중동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주요 외화 수입원인 관광 수입과 수에즈 운하 수익까지 망가뜨렸다.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에서 민간선박까지 공격하며 촉발된 ‘홍해 물류대란’은 이집트 GDP의 2%가량을 차지하는 수에즈 운하 수익을 반토막 냈다.
이집트의 심각한 외화 부족이 이어지며 웃돈을 주고라도 달러를 사려는 암시장까지 활개치고 있다. 알아흐람은 “1달러당 공식 환율은 약 31이집트파운드(EGP)지만, 암시장에선 1달러가 72EGP에 이달 초 거래된 사례가 확인됐다”며 “불과 두달 전 50EGP 수준보다 더 오른 것”이라고 전했다. 이집트 정부는 불법 환전 단속을 강화하고 있으나 효과는 미지수다.
화폐가치 하락에 금 투자에 몰려
호객 행위를 하던 한 점원은 “원래 예식을 준비하는 신혼부부들이 주로 많았는데, 지난해 말부터는 연령대 상관없이 금 가격을 문의하는 이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중년 부부는 “금목걸이나 팔찌를 보러 왔지만 착용 목적은 아니다”라며 “투자용으로 금을 싸게 구매하고 싶어 도매상점을 찾은 것”이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24캐럿 기준 금 구매 가격은 지난달 1그램당 4343EGP까지 치솟았다. 이달 말 3429EGP로 떨어지며 다소 안정세를 찾고 있으나 확신하긴 어렵다. 이집트 공급·내부무역부의 금 거래 담당자인 나기 파라그는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자산 분산 투자를 위해 현재 시장에선 금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세계적으로 금값이 상승한 것도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이집트 광산산업회의소는 지난달 성명을 통해 “금 가격대가 너무 부풀려져 실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소비자들은 금 구매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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