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한국’ 호통치는 쇼펜하우어에 빠지다
“중년 대한민국, 쇼펜하우어에 빠지다.”
쇼펜하우어가 인기다.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그를 다룬 책이 여러 권 눈에 띈다. 이를 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다. 쇼펜하우어 앞에는 ‘염세(厭世) 철학자’라는 말이 별명처럼 따라붙는다. 우울할 때는 어두운 음악이 끌리는 법, 어두운 쇼펜하우어에게 끌리는 사회가 밝고 건강할 리 없다. 대한민국의 평균연령은 2024년 현재 44.9살이다. 사회 전체가 ‘중년의 위기’에 빠져들 만한 시기라는 의미다. 불안과 무기력, 질투와 시기, 뜻 모를 분노 같은 중년을 휩쓰는 감정들이 대한민국의 상태를 짚어주는 열쇳말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흔들리는 중년 사회인 대한민국에 쇼펜하우어는 어떤 혜안을 안겨줄 수 있을까?
그들도 언젠가는 내가 겪는 고통을 겪겠지
“삶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은 ‘호통 치료(?)’에 가깝다. 그는 자기 철학에서 위로를 바라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그의 태도는 말기암 환자에게 남은 살날을 일러주는 냉철한 의사와도 같다. 삶은 고통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받다 병들고 늙어서 죽는다. 그러니 모든 희망을 버려라!
우리는 “내일은 나아지겠지”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희망 고문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삶은 절대 나아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신의 인생을 되짚어보라. 온통 부족한 것, 아쉬운 것투성이였지 않던가. 그래서 그대는 더 나은 능력을 갖추고 더 많이 가지려 아등바등했다. 하지만 지위가 올라가고 여유가 생겨도, 삶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번에는 권태가 찾아들었을 테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궁핍은 하류층을 때리는 채찍이고, 권태는 살 만한 이들을 파고드는 채찍이다.” 먹고살 만한데도 자꾸만 헛헛하고 우울해진다. 나라 전체가 그렇다. 대한민국은 이제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무기력과 뜻 모를 분노에 빠져들곤 할까. 이렇게 보면 쇼펜하우어가 한 말의 뜻이 헤아려질 듯싶다. 그의 주장은 염세주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쇼펜하우어의 잔혹한 선언은 되레 위안으로 다가온다. 왜 그럴까?
내가 행복하게 살 팔자라고 믿을 때는 찾아드는 어려움이 당혹스럽고 괴롭다. 반면 나는 원래 힘든 처지에서 살 운명이라 생각할 때는 늘 다가오는 고통에도 담담할 터다.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할 과정을 겪을 뿐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쇼펜하우어는 마흔은 넘어야 인생을 바라보는 혜안이 열린다고 말한다. 인생의 전반기는 오르막길이다. 생활이 버거워도 꼭대기에 다다르면 성취의 기쁨이 가득하리라는 희망에 가슴이 뛴다. 마흔 즈음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나이다. 산을 오를 때 보이지 않던 길의 끝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시기다. 그곳에는 몰락과 죽음이 있다.
젊을 때는 선배들의 잘나가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되고파서 조급했으리라. 이제는 그들도 결국 밀려나 세상에서 스러지는 광경이 가슴에 다가온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우리는 결국 마지막에 기력을 잃고 죽게 돼 있다. 이런 진실을 꿰뚫으며 중년들은 비로소 허허로운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나를 무시하며 밀어내는 후배들이 서운한가? 그렇지만 이들도 결국 누군가에게 밀려날 테다. 그들도 언젠가는 지금 내가 겪는 아픔을 똑같이 겪게 되겠지. 그러니 마음 상할 필요 없다.
올라가기 위해 나를 짓밟는 자들 탓에 화났던가? 이 또한 부질없다. 그들 역시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질 처지다. 우리는 모두 어두운 운명의 희생양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느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결국 저들과 나는 인생길의 아픔을 함께 겪는 ‘고통의 동반자’일 따름이다. 그러니 애써 이기려 하지 말라.
인생 패배주의자들의 정신승리법?
“들지 않으면 무겁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말은 위태로운 중년에게 위안을 준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을지 모르겠다. “이거 인생 패배주의자들의 정신승리법 아니야?” 하는 의문이 찾아드는 탓이다.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더 따라가보자. 어느 현명한 사람이 물었다. “저 커다란 바위는 무거울까, 무겁지 않을까?” 제자가 답한다. “무거울 듯싶습니다.” 선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자네가 저 돌을 들지 않을 때는 무겁지 않지.”
쇼펜하우어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야기다. 산을 오르려는 이에게 높고 험한 산은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보일 뿐이다. “욕망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고통이지만, 관조(觀照)할 때는 세상은 아름다움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젊고 혈기 넘칠 때는 인정과 성공을 거머쥐려 아득바득했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추켜올림과 칭찬이 부질없음을 안다. 부추김에 이끌려 잘 이용당하다가 버림받았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깨우침도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에 따라 휘둘릴 뿐이다.
쇼펜하우어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운 철학 설명보다 현대과학이 더 도움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후손을 남기기 위한 유전자의 숨은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생에의 의지’란 유전자와 비슷하다. 이는 생명을 이어가려는 강렬한 본능이다. 왜 돈 많이 벌고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가? 결국은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살아남았다면 멋진 상대를 만나 생명을 후손까지 이으려는 맹목적인 열망에 이끌렸을 터다. 이런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언제까지나 불행 속에 허우적대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지경에서 벗어날 길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욕망의 눈이 아닌 관조하는 태도로 바라보라
“예술은 삶의 꽃이다.”
“욕망을 채우고 고뇌하며 행복을 얻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는 거지가 손에 넣은 푼돈과 다르지 않아요. 오늘을 겨우 버틸 뿐, 내일은 또다시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인) 욕구를 이겨낸다면, 그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을 물려받은 듯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영원히 인생의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록과 보유(補遺)>, 우리말로는 보통 <쇼펜하우어 인생론> 정도의 제목으로 출판되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을 욕망의 눈이 아닌 관조하는 태도로 바라보라고 조언하는 쇼펜하우어는 갖춰야 할 삶의 태도까지 일러준다. 이어지는 산을 요긴한 금속이 묻힌 광맥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써먹을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산을 그 자체로 바라보라. 그제야 비로소 웅장한 산맥은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올 터다.
우리가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은 상식적이다. 노년에 이를수록 화초를 가꾸거나 자연 사진을 찍는 분이 늘어나지 않던가. 격한 갈등을 겪는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그래, 저 나이 때는 저게 심각한 문제일 거야”라며 고개 끄덕이는 노인도 떠올려보라. 삶을 욕망이 아닌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인생의 무게는 비로소 내 어깨에서 사라진다. 희극은 즐겁지만 비극은 아름답다. 아무리 커다란 바위도 들지 않으면 무겁지 않듯, 맞서 이기려 하지 않을 때 세상은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만 삶은 고통이다.”
나아가 그는 중년에게 이렇게 물을 듯싶다. “그대는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쾌락에 이끌리지 않고 고상한 미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부분이 있나요?” 미술관이나 연주회를 언제 가봤는지 헤아려보라. 근육도 훈련해야 생기는 법이다. 삶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예술 감각도 애써 가꿔야 한다. 중년의 삶이 욕정이 이끌리던 젊음의 세월과 같아서는 안 된다. 중년에는 욕망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세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이런 감각을 틔워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가 예술을 ‘삶의 꽃’이라 불렀던 이유다.
규칙적이지 않은 위대한 삶은 없다
“모든 불행은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면 중년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쇼펜하우어는 “규칙적이지 않은 위대한 삶은 없다”는 말도 했다. 나아가 그는 우리에게 ‘정신의 귀족’이 되라고 다그친다. 주변이 욕망을 들쑤시고 호기심을 잡아끄는 거리로 넘쳐나는 요즘이다. 이런 상태에서 저절로 내 삶이 놓여날 리 없다. 단 음식을 줄이고 식단 관리를 하며 운동으로 건강을 가꾸듯, 마음도 꾸준히 다스리고 챙겨야 한다.
중년은 외롭다. 그렇지만 넓은 인간관계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안기기도 한다. 이럴수록 “모든 불행은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깊고 풍성한 지성과 예술적 감성을 갖춘 사람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공부할 것들, 탐구해야 할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은 다르다. 고독할 줄 아는 중년이 돼야 한다는 소리다.
중년에 다다른 대한민국의 쇼펜하우어 열풍은 곰곰이 따져보면 바람직한 현상이다. 주의를 잡아끄는 스마트폰과 동영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가꾸는 ‘좋은 고독’을 바라는 이가 많은 듯싶어서다. 겨울의 끝 무렵이다. 중년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꿀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에 빠져보시길 권한다. 봄이 머지 않았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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