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설렌 ‘약속’ 지금 어디에…옛날식 다방에선 ‘추억’을 판다[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기자 입력 2024. 2. 2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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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방
을지다방의 대표 메뉴인 쌍화차, 그리고 옛날식 다방의 상징인 푹신한 소파. 한성우 제공
학림, 을지다방, 브람스…“쌍화차에 노른자?”를 묻는 레지는 없지만
삼삼오오 세월을 마시고, 어제와 오늘을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사라져서 더 그리운 곳, 지금 대학로 다방엔 젊은이들이 가득
홀연히 자취를 감춘 다방처럼 차 한 잔 나눌 그 사람도 떠날지 모른다
“우리, 언제”라 하지 말고 당장 마주할 곳을 찾자…“오래오래 가게”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았다. 고희를 바라보는 대학로의 ‘학림’, 그리고 곧 나이 사십이 되는 을지로의 ‘을지다방’과 안국동의 ‘브람스’이니 저마다의 자리에서 나처럼 늙은 다방이다. 앉으면 푹 꺼지는 푹신한 ㄱ자 소파, 낡은 LP와 스피커, 한쪽 벽면을 메운 세로글씨의 메뉴를 보면 틀림없는 옛날식 다방이다. 그런데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실없이 농담을 던지는 마담과 찰지게 껌을 씹으며 “아저씨, 쌍화차에 노른자 동동?”이라 묻는 ‘레지’가 없다. 그래도 걸쭉한 쌍화차와 비엔나커피가 있고 혼자 앉아서 추억을 곱씹거나 쌍쌍이 혹은 삼삼오오 앉아서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이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다방, 카페, 커피숍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 차와 커피는 물론 한약을 닮은 음료가 차로 둔갑해 팔리는 공간이다. 매일같이 출근해 죽치고 앉아 2 대 2 대 3 비율의 커피를 홀짝이는 이들, 시내 나들이를 나온 젊은 연인들, 옛 추억에 젖어 쓴 커피와 음악을 들이키는 이들 등 드나드는 사람은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찾아가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으로 남는 공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차 한잔 마시자’란 약속을 지키다 삼시세끼를 같이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끽다점’부터 ‘카페’까지
학림다방의 낙서, 이 낙서를 남긴 이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한성우 제공

“구보는 차를 마시며 문득 끽다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음료를 가져, 그들의 성격, 교양, 취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본다.” 1934년에 발표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는 ‘끽다점’이 나온다. 차 마시는 것을 선(禪)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종심선사의 ‘끽다거(喫茶去)’란 구절을 아는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겠지만 한자 ‘喫’은 매우 특이하다. 된소리가 극히 드문 한자 중 몇 안 되는 된소리 한자인 ‘끽(喫)’은 ‘마시다’의 뜻이지만 ‘끽연(喫煙)’에서는 ‘피우다’의 뜻도 있다. ‘먹다’의 뜻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음식이 아닌 기호품을 즐긴다는 뜻이 강하다.

훈과 음이 각각 ‘차, 다’인 한자 ‘茶’ 또한 매우 특이하다. 이 한자는 ‘차’로도 읽히는데 이것이 본래의 한자음이니 ‘차’는 고유어가 아닌 한자어이다. 그렇다면 한자음 ‘다’는 어디서 온 것일까? 15세기에 간행된 한글 문헌에도 ‘차’와 비슷한 소리로 표기되었는데 이후의 문헌에서는 ‘茶 차 다’와 같이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다’란 한자음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훨씬 이전의 한자음 정보가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茶’가 ‘차’ 또는 ‘다’로 읽힌다는 것을 알아야 ‘끽다점’을 비롯해 ‘다실, 다점, 차실, 차점, 찻집’이 모두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방과 비슷한 ‘카페(cafe)’는 무엇인가? 한때 다방은 노인네들이 가는 곳이라면, 카페는 젊은이들이 찾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렇지만 카페는 본래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카페테리아(cafeteria)’였으니 어원을 따져보면 카페나 다방이나 같은 뜻이다. 커피는 아라비아의 것이 서양으로 들어가 대중화된 것이니 동양에 차를 파는 곳인 ‘다방’이 있다면, 서양에는 커피를 파는 ‘카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음료에도 영향을 미쳐 다방은 차를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만 파는 ‘진짜 다방’은 ‘전통찻집’이라 불리고 차는 안 팔고 커피만 파는 곳은 ‘커피숍’ 또는 ‘커피전문점’으로 불린다. 차만 전문으로 파는 집도 있긴 한데 ‘밀크티(milk te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차는 전통적인 차와는 거리가 멀다. 이래저래 진짜 다방 혹은 옛날식 다방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간혹 보이는 다방은 어쩌다 살아남거나 일부러 ‘레트로(retro)’를 내세우는 다방일 뿐이다. ‘청년’이나 ‘백씨’가 대담하게 간판에 ‘다방’을 내걸기는 했으나 생뚱맞은 떡볶이에 당황하거나 옛날식 다방 커피에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뿐이다.

다방에서 파는 것

“안 마담 말여, 여기 보리 숭님만 두 사발 들었다 놓구 갈게 아니라 말여, 돈 받을 것두 두어 보세기 퍼 오야 허잖여. 그 왜 촌놈 설탕 맛으로 마시는 거 있잖여.” 소설가 이문구는 1970년대 초 충남 대천의 다방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았다. ‘보리 숭님’은 흔히 ‘엽차(葉茶)’라고 불렸던 ‘보리차’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엽차라면 찻잎을 끓인 것이라야 할 텐데 볶은 보리를 끓인 물이 그 자리 차지를 대신하게 된 것도 다방이 빚어낸 풍경이다. 그래도 역시 다방의 대표 메뉴는 분말 커피, 설탕, 크림을 저마다의 황금비율로 타주는 ‘다방 커피’이고 이것이 ‘내린 커피’를 주는 커피전문점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2024년 눈비가 내리는 겨울날에 찾아간 다방의 대표 메뉴는 쌍화차와 비엔나커피이다. 차라 불리긴 하지만 본래 한약 쌍화탕을 간소화하고 거기에 달걀노른자까지 동동 띄웠으니 실로 괴상한 차가 아닐 수 없다. 다방이란 이름에 걸맞게 차를 팔아야 하고 이왕이면 건강을 챙길 수 있는 비싼 값에 팔 메뉴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비엔나커피는 도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정작 본고장 빈에서는 마부가 마시는 커피를 뜻하는 ‘아인슈패너 커피(Caffe Einspanner)’라 불린다. 대학로에 자리 잡아 먹물이 든 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이 다방이 촌놈들이 설탕 맛으로 마시는 다방 커피와 구별되는 메뉴를 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다방을 찾는 이들은 차만 마시고 갈 이, 즉 끽다거하려고 온 이들은 아니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렸다 만나는 이, ‘도끼빗’을 뒷주머니에 꽂고 느끼한 목소리로 노래를 틀어주는 오빠를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손전화가 없던 시절 어디선가 걸려올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에는 조용한 도서관 놔두고 커피 한잔으로 자리를 도맡아 공부하는 ‘카공족’도 많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 결국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마실 것 하나를 사이에 놓고 만날 수 있는 곳이 다방이다.

요즘의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추억을 팔고 있다. 씁쓰름한 커피 맛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쌍화차가 입맛에 맞을 리가 없다. 그런데 다방을 찾은 많은 젊은이들이 쌍화차를 시킨다. 다방 커피를 시킬 만도 한데 그건 일회용 커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니 매력적이진 않다. 비엔나커피도 그렇지만 아이스크림, 과일, 과자, 생크림 등이 어우러진 파르페도 시중의 커피전문점에서는 맛보기 어려우니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찾는다. 모두가 달콤한 맛이다. 그렇다 이왕이면 추억도 달콤한 것이 좋다.

나처럼 늙어가는 추억
다방에 앉아 전화를 기다리던 이들이 쓰던 을지다방의 오래된 전화. 한성우 제공

을지로의 다방에는 20대 남자와 여자 2명씩 각 한 테이블, 60대 여자 2명 한 테이블, 근처 인쇄소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50대 5명 한 테이블 이렇게 차지하고 있다. 말을 이을 때 살짝 끌어올리는 말투의 20대 젊은이들과 새침한 서울 말투를 쓰는 60대의 말투가 어우러진다. 그리고 사뭇 심각해보이는 50대의 무거운 말투도 다방 커피처럼 섞인다. 대학로의 다방에는 젊은이들 일색이다. 2층의 여섯 테이블에 두 명씩 앉아 있는데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은 연인 사이 두 쌍은 비엔나커피보다 더 달콤해보인다.

그런데 대학로 다방의 한가운데 테이블에 녹색의 맥주병 하나를 놓고 연신 전화를 걸어대는 50대 남자가 유난히 튄다. 이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는지 ‘나 지금 거기야’라며 전화번호부 속의 모든 친구에게 전화를 돌린다. 남자 동창들과 통화할 때 다소 거칠었던 말투가 일순간 부드러워지더니 ‘몇 시에 어디서’라는 약속까지 잡고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만나는 이가 ‘첫사랑 그 소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어디에서 나처럼 늙은’ 모습에 실망하기보다는 첫사랑 그 시기의 마음으로 만나길 기원해본다.

안국동의 카페 얘기를 했더니 지금도 음악에 심취해 있는 친구가 그곳의 풍경을 복기해낸다. 브람스의 얼굴과 커다란 글씨로 쓰인 이름, 마루와 의자의 색, 그리고 흐르던 음악까지 말해준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빼놓는 것이 있다. 그날 그 자리 자신의 눈동자에 눈부처로 앉아 있던 그 사람이다. 그 눈부처가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면 그리워하지는 않을 터,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눈부처처럼 희미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를 그 사람 이야기가 빠져 있다.

오래 가게, 아니 오래 가시게
을지다방에 걸려 있는 ‘오래된 가게’ 인증. 오래 가시게. 한성우 제공

“언제 차 한잔 마시자.” “조만간 밥 한 끼 먹자.” 최근에 이 말을 입 밖으로 낸 기억이 있다면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가 아니면 약속 혹은 다짐이었는가? 이 말대로 차 한잔 또는 밥 한 끼를 먹었는가?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말이다. 이 말을 믿고 약속을 잡자는 연락이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지 못해서 서운한 것은 아닐 터이다. 차와 밥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것이리라.

수없이 많았다가 어느 날부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다방처럼 차 한잔 마실 그 사람도 내 곁에서 떠나갈지도 모른다. 차 한잔이 밥 한 끼가 되고 그 한 끼가 삼시세끼도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내놓고 그리워하기 전에 당장 차 한잔 마실 곳, 다방이 아니더라도 차나 커피를 마주하고 앉을 곳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차나 커피를 팔지만 우리를 위한 자리도 같이 파는 곳, 그래서 우리의 추억이 시작되게 만들어주는 그곳이 ‘언제’ 혹은 ‘조만간’이 아닌 당장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을지로의 다방 안에 네온사인으로 멋지게 그려놓은 ‘오래 가게’가, 그리고 대학로의 다방 기둥에 붙은 ‘서울 미래 유산’이란 문구가 의미 깊게 다가온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오래 가게’란 명칭을 지은 이는 상을 받을 만하다. 본래의 의미는 ‘오래된 가게’이겠지만 입으로 읊어보면 ‘먼 훗날까지 오래 살아남아 가시게’라는 말로 들린다. 작은 다방 거대도시 서울의 미래 유산이 되는 것이 우습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곳에서의 수많은 만남을 생각해보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그 자리에 지금의 내가 가서 차 한잔 마시는 것도 먼 훗날에는 소중한 유산이 된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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