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후회 없이, 함께, 꿈을 꿀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시는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열광했던 영화들이 있었고, 그런 영화와의 마주침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발견한 행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어떤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 것도 간단하진 않다.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최근 우리의 기억을 물화한 놀라운 책이 한 권 나왔다. 이름 하여 <대사극장>. 총 850여 쪽에 달하는 이 작업에 붙은 부제는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다. 출간의 변은 이렇다. “한국영화의 전통하에서 대사는 시대와 인간을 드러내는 압축적인 지도의 역할을 해왔다.”
책은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영화에서 기억할 만한 대사들을 큐레이션 한다. 첫 대사는 “선생님은 제 마술에 걸린 거예요”(<운명의 손>, 1954)다. 이로부터 “가자… 가자!”(<오발탄>, 1961),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별들의 고향>, 1974),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9), “나가자, 나가자!”(<파업전야>, 1990), “밥은 먹고 다니냐?”(<살인의 추억>, 2003),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관상>, 2013) 등 주옥 같은 대사들이 소개된다.
살면서 만나온 수많은 대사 중 특히 어떤 대사가 마음에 와닿는가는, 나의 지금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터다. 오늘 아침 책을 들춰볼 때 내 눈을 사로잡은 대사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각하께서도 참 오래 하십니다.” <효자동 이발사>(2004)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이발을 담당하던 이발사(송강호)가 악의 없이 내뱉는 한마디다.
이런 대사도 그냥 넘길 수 없다. “니들, 그 냄새 맡아본 적 있어? 새끼 잃은 부모 속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냐, 이 말이여. 부모 속이 한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까지 진동하는 거여.”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거부한 2024년의 대사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말은 2006년 박스오피스를 강타했던 <괴물> 속 희봉(변희봉)의 말이다.
이런 대사도 있다. “진실은 감옥에 가둘 수 없다.” 1987년 시민혁명을 그린 <1987>의 말. <헌트>(2022)라는 영화에선 김정도(정우성)가 이렇게 말한다. “국권을 찬탈하고 국민을 학살한 죄로 너를 즉결 처형한다.” ‘참 오래하신 각하’를 심판하려는 ‘좋은 군인’의 꿈을 담은 대사고, 같은 배우가 연기한 <서울의 봄>(2023)의 이태신(정우성)은 마찬가지로 같은 역사적 인물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대한민국 국민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다큐멘터리 <건국전쟁>(2024)에 대해 한국영화의 기울어진 균형을 맞추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역사적 권력’, 즉 우파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시대정신 위에서 융성했다. 다만 그 균형을 역사왜곡으로 맞추려 하니, 그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유독 극장에서 “가둘 수 없는 진실”의 말이 꽃을 피웠을까? 극장은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한 꿈을 함께, 집단적으로 꾸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편향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것이, 곱든 밉든, 한국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대사극장>을 마무리하는 말은 “잇츠 굿~”이다. <킬링로맨스>(2023)의 유행어. 관객들은 이를 “잇츠 귯~”이라고 따라하곤 했다. 배우 이선‘균’의 대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한국영화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국가가 ‘마약과의 전쟁’을 홍보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던 한 영화인의 부당했던 마지막. 우리는 이제 영화를 통해 또 어떤 집단적인 꿈을 꿀 것인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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