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Rainbow]사적인 이야기는 그만하라고요?
“아이 키우는 사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왜 봐야 하죠?”
다큐를 만들면서 프리랜서 강사로 일하는 30대 여성은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한 면접에 들어갔을 때 이 질문을 여러 번 들었다. “20대 때는 여성 감독이 많았는데, 결혼하고 출산하면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아이 낳고 일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네요.”
이 여성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적인 이야기’라는 말을 곱씹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일하면서 계속 고민했던 말이어서였을 것이다. 신생아를 키우던 시절, 온몸으로 우는 아이 앞에서 같이 울고 싶어질 때 엄마는 말했다. “너도 정말 많이 울었다. 잠 좀 자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시어머니도 “아이 낳고 우니까 친정엄마가 눈 나빠진다고 울지 말라 해서 서러웠다”고 말했다. 두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왜 이 많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들은 공적으로 유통되지 않았을까. 여성의 영역으로 미뤄둔 이야기들은 사적인 관계들 안에서만 공유돼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아이 키우는 일뿐 아니라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대체로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격리됐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여러 ‘사건들’을 거쳐야 했다. 9세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강간당한 아이는 30세가 된 1991년 가해자를 살해했다. 결혼했지만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그는 가해자를 고소하려 했지만 사건 발생 후 6개월 이내 해야 한다는 당시 상황에 좌절한다. 그는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는 절규를 남겼다. 1996년 72세 할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도피한 딸을 보호하려다 사위를 살해한다. 사건 이후 딸이 여러 번 신고했는데도 경찰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두 사건 이후 성폭력특별법이 1993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1997년 제정된다.
사적인 문제로 치부됐던 일들이 공적 문제로 발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해들이 쌓였을까. 기록되지 못한 울분들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두 사건 이전 피해 여성들에게 쏟아진 말은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다” “가정 내 문제이기 때문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다”였다. 아직도 여성들은 ‘또 사적인 이야기’를 다룰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이 30대 여성 감독을 둘러싼 불평등한 구조도 시간이 흐르면 공적으로 더 많이 발화될 것이다. 출산·육아와 여성의 노동 문제는 저출생 심화가 보여주듯 사적인 일로 치부되기에는 많은 구조적 문제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그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데도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걸고 만들어진 정권은 어렵게 만든 성과들을 뒤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 선거가 다가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김현숙 여가부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 장관을 임명하지 않았다. 여가부를 차관 대행 체제로 운영하다 총선 이후 다수당이 됐을 때 공중분해시킬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윤 정부는 이미 지난해 성평등 정책 예산을 삭감하며 ‘여가부 폐지’를 내세운 정부의 기조가 어떻게 성평등 정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줬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정치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또 이렇게 ‘젠더’는 갈라치기 대상으로 호명됐다. 공천 다툼에 빠진, 무력한 야당 또한 여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도 주지 못하고 있다.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은 책 <연대하는 페미니즘>에서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 발표된 ‘여성행동강령’에 따라 정부가 10년간 ‘성 주류화 전략’을 도입·실행했지만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성평등 개혁이 어느 정도 이뤄진 이후에는 오히려 딜레마가 드러났다고 분석한다. 법·제도가 있어도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 현 상황을 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성 주류화’란 정부·공공 부문의 모든 정책에서 성별관계의 불평등을 생산하는 구조의 근원적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왜 이러한 딜레마가 나타났을까. 정 전 장관은 성평등을 추진하는 정책 거버넌스가 허약하다는 점을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거버넌스의 핵심 주체여야 할 여가부는 조직 규모와 예산도 작지만 기능도 약하다. 여성 고용정책, 직장 내 성희롱은 고용노동부, 보육과 돌봄은 보건복지부, 성폭력 조사는 국가인권위 등으로 흩어져 있다. 이 상황에서 여가부를 성평등부로 격상하고 흩어져 있는 기능을 연계·통합할 것인가, 해체할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결국 여성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사적인 일로 치부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심화시키느냐, 아니면 반대로 공적인 공간으로 끌어와서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임아영 젠더데스크·플랫팀장 layknt@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명태균 연구소 각서에 “대선 후 김건희에게 돈 받아 미수금 변제”
- 조국, 윤 대통령 향해 “매일 술 먹어도 정치만 잘하면 넘어가고 싶었는데···탄핵 뚜껑 열렸다
- [단독] 박서진, 정신질환 거짓말했나···“병역면제 재검여부 밝혀달라” 추가민원
- “오늘부터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 쓰세요”···연말정산 꿀팁, 국세청이 알려드림 [경제뭔데]
- 소변만 닿으면 다 안다…변기에 ‘착’ 달라붙은 건강 지킴이 등장
- 친한 “전에도 4표 이탈 했다” 친윤 “통과 땐 한동훈 정치생명 끝”…김건희 특검법 재표결 신
- 국방장관 “윤 대통령, 군 골프장서 골프는 사실…노무현도 거의 매주 운동”…야당 ‘발끈’
-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마무리 눈앞···“내 아시아나 마일리지는 어쩌죠”
- 손발 시린 ‘수족냉증’··· 추워서 생긴 게 아니었어?
- 사장 살해하고 ‘자전거 사고사’ 목격자인 척···징역 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