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규의 저널리즘책무실] ‘극단적 선택’, 언론의 고민이 담긴 표현이지만…

이종규 기자 2024. 2. 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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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대교 난간에 자살방지를 위한 문구 ‘누군가 내 곁에 있어\'가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 자주 보셨을 겁니다. ‘자살’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입니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도 극단적 선택을 자살의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언론에선 언제부터, 왜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을까요?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베르테르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입니다. 소설 속 베르테르는 한 여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소설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따라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잇따라 발생한 겁니다. 이 때문에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판매 금지 조처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200년이 지난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언론 보도가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년간 신문에 실린 자살 사건 보도량과 자살률의 변화를 분석해보니, 자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달과 그다음달에 자살률이 평소보다 급증했다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언론 보도에 따른 모방 자살 효과를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줄지어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선진국은 자살 보도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자살 예방을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제정했습니다. 자살 관련 보도를 신중하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한국에선 2004년 한국자살예방협회가 주도해 자살 관련 언론 보도 권고기준을 마련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로 올라선 직후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살률은 계속 치솟아 2009년에는 30명대를 넘어섰습니다. 자살 보도 권고기준이 마련됐음에도 2008년 배우 최진실씨와 안재환씨가 숨진 직후에는 자극적인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중앙자살예방센터(현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통계를 보면, 최진실씨가 숨진 이후 두달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3081명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1807명)에 견줘 60%가량 늘었습니다. 최진실씨와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같은 기간 2.4배나 늘었습니다. 2011년에는 자살률이 31.7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자살률이 계속 높아지자 2013년 ‘자살 보도 권고기준 2.0’이 제정됩니다. ‘극단적 선택’이란 말이 ‘자살’의 대체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입니다. 권고기준 2.0의 9가지 원칙 중 두번째가 ‘자살이라는 단어는 자제하고 선정적 표현을 피해야 한다’입니다. 위기소통 전문가로 권고기준 2.0 제정에 참여한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핀란드를 비롯한 일부 나라에서 자살을 줄이기 위해 자살이란 말을 쓰지 않기로 했고, 그 결과 자살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권고기준 2.0 제정에 참여한 언론인 사이에서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렇다고 언론이 자살 보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고민 끝에 고안해낸 말이 ‘극단적 선택’입니다. 명확한 인과관계야 알 수 없지만, 그 뒤로 자살률은 점차 낮아져 2017년엔 24.3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후 등락을 거듭하다 2022년엔 25.2명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를 써선 안 된다는 의견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자살을 ‘삶이 힘들 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백종우 경희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지난해 5월 기자협회보에 쓴 글에서 “고민하고 또 고쳐 쓰는 언론인의 마음을 담기에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는 자살 예방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겨레는 앞으로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자살이란 말은 기사의 흐름상 꼭 필요할 때에 한해 본문에만 예외적으로 쓸 방침입니다. 연간 1만3천명가량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서, “죽음의 문제를 제발 선택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외침”(유현재 교수)에 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자살 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도 태도입니다. 지난해 말 배우 이선균씨 사망 사건에서도 일부 언론이 자살 방법을 적시하고 유서를 공개하는 등 보도 윤리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여 비판을 받았습니다. 한겨레는 어떤 이의 죽음을 보도하는 일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보도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식으로 알려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겠습니다.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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