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투사하는 이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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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시대와 인간을 투명하게 조망하고 적확하게 해석하는 이론에 대한 갈망이 '탄산수의 포말'처럼 샘솟는다.
'왜 저 정치가는 저렇게 행동할까? 왜 저 사람은 저런 기회주의적 선택을 할까?' 이런 의문 앞에서 인간의 행위와 욕망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는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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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시대와 인간을 투명하게 조망하고 적확하게 해석하는 이론에 대한 갈망이 ‘탄산수의 포말’처럼 샘솟는다. 우리는 늘 궁금하다. ‘왜 저 정치가는 저렇게 행동할까? 왜 저 사람은 저런 기회주의적 선택을 할까?’ 이런 의문 앞에서 인간의 행위와 욕망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는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 생각은 단지 학자나 사상가만의 것은 아닐 테다.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이런 감정이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지난해 번역 출간된 ‘악에서 벗어나기’(강우성 역)가 바로 그런 적실한 이론을 설파하는 문제적 저서이다. 저자인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가 49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후 이듬해(1975) 유작으로 발간된 이 이론서는 지금 이 시대 현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소중한 영감과 통찰력을 제공한다. ‘악에서 벗어나기’를 함께 읽었던 동료들과의 세미나는 귀한 지적 자극의 향연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이해의 빈틈을 프로이트적 접근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펼친다. 베커는 인간의 동물적 속성에 주목하며, 인간의 저 노골적인 인정욕망과 야수와 같은 본능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펼친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동물”인 인간의 정념과 “자기 확장과 영속화를 향한 인간의 갈망”을 읽어낸다. 선비다움을 강조하는 한국의 문화에서 인간의 이 같은 속성에 대한 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
이런 문제의식은 최근에 개봉된 영화 ‘추락의 해부’의 한 장면과도 포개진다. 202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한 ‘추락의 해부’는 남편 사뮈엘을 살해했다고 의심받는 용의자 산드라의 재판과정을 통해 인간의 심층적인 욕망과 적나라한 진실의 잔해를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이 드러낸다. 특히 남편의 추락사를 둘러싼 사인(死因)을 추적하는 장면에서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 및 둘의 경합하는 욕망이 매우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작가로 성공해 정신없이 바쁜 나머지 가정에 소홀한 산드라에 비해, 실패한 작가 사뮈엘은 여러모로 초라한 상태다. 그는 가정생활과 육아에 자신이 일방적인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진다. 좌절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사뮈엘의 간절한 열망은 베커가 표현한 “생물체가 의미를 찾고 지구 행성에 자취를 남기려는 불타는 욕망”과 멀지 않다.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는 극단적인 선택의 유혹에 시달린다.
‘악에서 벗어나기’에 서술된 “인간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절멸이 아니라, 무의미한 소멸이다”, “필멸성을 부정하고 영웅적인 자기 이미지를 얻으려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충동”은 정치의 계절인 이 시대 한국사회를 그대로 투사하는 문장이다.
선거철에는 여러 구호와 공약이 난무한다. 이런 때일수록 표면적인 주장 밑에 은폐된 무의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강렬한 선동과 진영 대결 속에,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욕의 정점에 계속 서고 싶다는 ‘영속에의 욕망’은 자주 은폐된다. 인간의 저 끈끈한 인정욕망과 무의미한 소멸에 대한 본능적 공포, 이런 정념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대처가 부족할 때, 개혁은 좌초된다. 개혁과 변화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이 그 반대편의 욕망보다 훨씬 집요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한 발짝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악에서 벗어나기’가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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