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농성장에는 ‘어제의 카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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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외관이지만 단단한 골격을 갖춘 농성장 아래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인다.
오늘의 메뉴는 하루 묵은 카레다.
단체 식사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한국식 카레를 제 양에 맞게 푸고 둘러앉는다.
양파를 잘게 썰어 형태가 사라질때까지 달달 볶아 고형카레 넣고 푹 끓여낸 일본식도 좋고, 진한 향신료가 매력적인 커리도 좋지만 당근과 감자, 양파를 때려 넣고 눌러 붙지 않게 잔불로 묽게 끓여 하룻밤 재워둔 한국식 카레야말로 농성장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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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허름한 외관이지만 단단한 골격을 갖춘 농성장 아래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인다. 익숙한듯 의자를 꺼내고 스피커를 켠다. 밤새 먼지가 쌓인 상을 닦아내고 그 자리에 성찬상을 차린다. 성만찬을 위한 잔과 그릇이다. 사제는 복장을 갖추고 집례를 준비한다. 몇 마디 나누는 인사 외에 분주히 오가는 말은, 필요가 없다. 평생을 해온 일인 것 마냥 모든 준비가 자연스럽다. 제주도 남쪽 강정마을, 10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강정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기 위한 풍경이다.
진행되는 동안, 순서지는 없었다. 참석자들은 읽어야 하는 모든 구절과 불러야 하는 모든 찬가를 외우고 있다. 주민들 반대를 무릅쓰고 온갖 상처를 남긴 채 완공된 해군기지 앞, 그렇게 오늘도 평화를 염원하는 한 토막의 기도가 봉원됐다. 미사 후에는 기지 정문 앞에서 활동가들의 인간띠잇기가 진행됐다. 제법 오래 전 강정에 왔을 때도 미사가 있었고, 인간띠잇기가 있었다. 어떤 이는 8년간 마을에 살며 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새로이 합류해 평화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이들과 함께 오래된 노래를 부르고, 오래된 춤을 추며 한바탕 평화시위를 한다. 이 일을 매일 같이하고 있다.
평소 움직이지 않던 관절을 움직이고, 한바탕 웃기도 하니 어김없이 배가 고프다. 점심시간을 약간 지나서 집회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참가자들은 익숙하게 물품을 정리하고 걷는다. 이제 밥 먹을 시간이다. 아침 7시에는 생명평화백배, 11시에는 미사, 12시에는 인간띠잇기, 그 후에는 모두가 모여 공동식사를 하기 위해 ‘삼거리식당’에 모인다. ‘종환 삼춘’이 묵묵히 밥 짓는 노동을 하며 주민과 활동가, 찾아온 손님들을 배불리 먹인다.
2016년 해군기지 완공을 앞두고 삼거리식당 또한 행정대집행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이전보다 절반 크기로 현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하루 묵은 카레다. 단체 식사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한국식 카레를 제 양에 맞게 푸고 둘러앉는다. 말 없는 삼춘은 고맙다는 말에 눈인사로 답한다. 양파를 잘게 썰어 형태가 사라질때까지 달달 볶아 고형카레 넣고 푹 끓여낸 일본식도 좋고, 진한 향신료가 매력적인 커리도 좋지만 당근과 감자, 양파를 때려 넣고 눌러 붙지 않게 잔불로 묽게 끓여 하룻밤 재워둔 한국식 카레야말로 농성장에 어울린다. 얹어 먹지 말고 비벼먹자. 김칫가루 뻘겋게 물드는것 무서워 말고 팍팍 올려 비빔밥 먹듯 크게 한술을 뜨자.
어떤 싸움은 그 끝을 짐작 못할 만큼 먼 길을 걸어간다. 처음 내뱉었던 말보다 더 크고 깊은 시간을 묵으며, 가보지 못했던 길 위에 서 있곤 한다. 강정은 이제 해군기지 폐쇄와 더불어 그보다 더 큰 전쟁을 반대하고, 그보다 더 큰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렇게 묵어 깊은 평화의 맛을 내기까지, 부단한 노동들이 있었다. 매일 아침 절을 하고, 피켓과 깃발을 챙기고, 춤을 추며, 기도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17년간의 잔불과 하룻밤의 기다림 끝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평화를 짓는다.
누군가 내놓은 고운 빛깔 천혜향을 후식 삼다 농사 얘기로 테이블이 한껏 들떴다. “제초제가 죽이지 못하는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그 독한 게 무얼 죽이지 못할까. “씨앗이에요. 씨앗만큼은 죽지 않아요.” 군사기지와 미사일, 전쟁과 학살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지금, 남쪽의 작은 마을은 오늘도 밥을 짓고 평화를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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