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과학자는 '떼도둑', 전공의는 '집단이기주의'로 모는 정부
대통령실에 ‘과학기술 수석’을 신설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차관 3명을 한꺼번에 교체했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우주항공청의 본격적인 출범 작업도 시작하고 과학기술계의 숙원이었던 26개 출연연의 공공기관 지정도 해제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행보도 부쩍 잦아지고 있다. 1월에는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신년 인사회에 참석했고, 2월에는 의료개혁·과학기술·원전산업에 대한 민생토론회를 연이어 개최했고, 바쁜 일정에도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KAIST의 학위 수여식에도 참석했다.
과학 강국으로의 퀀텀 점프를 위해서 연구개발(R&D) 예산의 대폭 확대를 비롯한 정부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직접 밝히기 위한 시도였다.
● 여전히 암울한 과학기술계
그런데도 과학기술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암울하다. 올해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4조6000억원(14.7%)이 삭감된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대통령의 일방적인 지시로 갑자기 등장한 ‘글로벌 연구개발 사업’의 규모도 1조3000억원이 늘어났다. 대학·출연연·기업의 연구개발 현장에 실제로 투입되는 연구개발 예산은 무려 5조9000억원(18.8%)이나 줄어든 셈이다. 연구 현장에서 절박한 비명이 쏟아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연구과제의 삭감·중단에 합의된 분명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날아오는 삭감·중단 통보를 거부할 수 없는 연구자의 입장이 몹시 난처하다. 신규 과제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대학원 학생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민생토론회에서 요란하게 내놓은 이공계 대학원 학생에게 지원하겠다는 인건비와 장학금의 재원을 정부가 따로 마련한 것도 아니다. 결국 대학에서 과제 수행에 투입할 수 있는 연구비를 쥐어짜야만 한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겠다는 것이다.
고질적인 PBS(성과기반예산제도) 때문에 스스로 인건비를 확보해야 하는 출연연 연구자의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수탁 예산 비중이 높은 기관은 연구원의 봉급을 챙겨주기도 어렵다고 한다. 대형 기기의 가동 시간을 줄이기로 한 출연연도 있고 기관 운영을 위해서 은행 대출을 고민하는 출연연도 등장할 수 있다는 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정체도 불확실한 ‘글로벌 연구개발 과제’를 따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기정통부 혁신본부가 급조한 ‘글로벌R&D특별위원회’라는 거창한 명칭의 범부처 컨트롤타워가 글로벌 연구개발 사업의 성격과 미래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결국 글로벌 연구개발 사업은 연구 현장의 연구자가 아니라 혁신본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퍼주기 사업’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국가별 논문·특허로 기술 수준을 평가하고 우리의 기술 경쟁력과 기술 발전 주기를 기준으로 협력 유형을 구분하겠다는 발상으로는 실질적인 국제협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일이다.
과기계의 숙원이었던 공공기관 지정 해제가 새로운 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걱정스럽다.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벽 허물기’가 혹시라도 ‘출연연 통폐합’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간 벽 허물기를 핑계로 통폐합을 강요하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사업’의 불똥이 엉뚱하게 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국민 세금으로 마련한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약탈적 카르텔’이라는 오명(汚名)을 벗지도 못했다. 오히려 연구개발 예산의 졸속 삭감에 대해 저항하던 KAIST 졸업생이 학위복으로 위장한 경호원에 의해 입이 틀어막혀서 사지가 들린 채 졸업식장에서 끌려 나가는 흉한 ‘입틀막’이 벌어졌다. 연구개발 예산의 대폭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반복적인 발언이 오히려 ‘떼도둑’(카르텔)으로 추락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봉재 경북대 교수와 고아라 전남대 교수가 ‘네이처’에 실은 기고문의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연구개발 지출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GDP 5%로 유지하겠다’고 밝히고 나서 불과 몇 달 만에 단행된 연구개발 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는 지적은 뼈아픈 것이다.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으로 학령 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대학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젊은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돌아간다’는 지적도 중요하다.
● 전공의·의대생과 거칠게 충돌하는 정부
정부가 의료 개혁을 두고 젊은 전공의·의대생과 정면으로 볼썽사납게 충돌하고 있는 현실도 과학기술계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가 수련 과정도 마치지 못한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을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현실은 황당한 것이다. 의대생까지 나서서 의대 증원을 거부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의료 개혁의 본질이 심각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의료 개혁의 단초였던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이 단순히 의사 수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욱이 의대 정원 증원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의료 붕괴의 현실을 바로잡는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의대 증원으로 실제 의료 현장의 의사 수가 늘어나는 데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구 1000명 당 의사의 수가 2.6명으로 OECD의 평균 3.7명보다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1년간 1인당 진료 횟수’는 17.2명으로 OECD 평균 6.8명의 2.5배나 된다. 더욱이 ‘예방 가능한 질병에 의한 사망’과 ‘치료 가능한 질병에 의한 사망’은 OECD 평균보다 압도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의사의 수는 많지 않지만 국민의 의료 접근성은 절대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필수의료·지역의료·공공의료에서 드러나고 있는 심각한 어려움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의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잘못된 의료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지역 의대의 정원을 늘린다고 ‘지역 의사’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 것이다.
현재 의대 정원의 65%를 한꺼번에 늘이면 정상적인 의사 양성은 불가능해진다. 의대에서의 교육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6년 후에는 100개의 수련병원에서 5000명의 인턴을 채용해서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물론 그 부담과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간다. 국가 발전을 위해 정부가 중요성을 인정하는 ‘이공계 교육’도 무너지게 된다. ‘의대 쏠림’을 넘어 ‘의대 몰빵’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다.
고심 끝에 자발적으로 의료 현장을 떠나버린 전공의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의미가 없다.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잡고 ‘파업’을 하는 나라가 없다는 보건복지부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억지다. 의사의 파업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전혀 볼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 등의 여러 국가에서도 의사·간호사가 파업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간호사에게 불법적인 업무를 떠맡기는 ‘PA(의료진료) 간호사’를 시범 시행하겠다는 보건복지부의 발상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정부가 간호사를 범죄자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의사가 전공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도 볼썽사납다.
아직 수련 과정도 끝내지 못한 전공의·의대생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협박과 겁박을 계속하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과학자를 ‘떼도둑’(카르텔)으로 매도했던 작년 여름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칫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을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걱정해야 한다. 어설픈 ‘여론조사’를 믿고 의료 대란을 서둘러 해결하지 못하면 총선에도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
정부가 입장을 바꿔야 한다. 필수·지역·공공의료의 심각한 현안을 바로잡을 직접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10년 후에나 활용이 가능한 의대 증원은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2020년의 아픈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엉뚱한 의대 증원으로 온 나라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국민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어 버린 보건복지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 성공한 과학기술 대통령
과학기술계가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잔뜩 들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성공한 과학기술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밝혔던 구상은 화려했다.
대통령이 직접 과학기술을 챙기고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정부 고위직에 중용해서 국정 전반에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고 했다. 낙하산 인사로 과학기술을 함부로 흔들지 못하게 만들고 출연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지난 1년 9개월의 성과는 절대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은 국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 결정 시스템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학기술이 반도체·양자컴퓨터·이차전지로 변질되고 말았다. 출연연의 기관장 선임 과정마저 실종되어 버렸다. 임기가 끝난 기관장이 퇴임을 하지 못하는 인사 난맥상이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과기부와 대통령실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과학기술의 핵심 분야인 의료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성공한 과학기술 대통령의 길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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