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정치에도 R&D가 필요하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4. 2. 2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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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920쪽 정책 보고서 ‘보수의 약속’
보수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 밝혀
영국 보수당 길 잃었을 때는
내부 지적 혁명으로 대처 정부 출범
철학·가치 성찰 부족한 한국 보수
벼락치기로 선거에 급급
한국판 ‘보수의 약속’ 필요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정책 보고서 ‘보수의 약속’(Conservative Promise)이 화제다. 이는 헤리티지 연구재단을 중심으로 한 80여 보수 단체의 합작품으로, 예산 300여 억원은 시민 성금으로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칭하지도 않았고, 바이든이라도 자신들의 정책을 수용하면 돕겠다고 했지만 ‘프로젝트 2025′라는 부제가 말하듯 누가 봐도 ‘트럼프 공약집’이 맞다. 실제로 트럼프가 내년에 이 문건을 활용할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국의 이런 정치 문화는 부럽다.

미국 공화당 정책보고서 "리더십 지침. 보수의 약속(Conservative Promise)" : 프로젝트 2025

‘보수의 약속’은 ‘리더십 지침’(Mandate for Leadership)이라는 제하의 미국 공화당 쪽 집권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최신 버전이다. 시작은 1980년대 초 레이건 대통령 시절로 이번이 아홉 번째다. 920쪽짜리 이 보고서 서문은 작금에 미국이 처한 현실에서 보수 정치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정치 불신 심화, 만성적 민생 위기, ‘철밥통’ 행정 국가, 약물과 포르노 범람 같은 사회적 기강 문란, 인종과 성별 및 성적 지향과 관련된 ‘정치적 올바름’(PC)의 과잉에 맞서 가족 회복과 자녀 보호, 개인의 자유 및 자치권 보장, ‘미국 우선주의’를 통한 자국민 이익 최우선 등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비판이 많다. 법치주의 퇴조와 인권침해, 권력의 ‘견제와 균형’ 원칙 위배 같은 점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 가능성을 지레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에 ‘어린아이’나 ‘럭비공’이라는 말로 ‘트럼피즘’(Trumpism)을 폄훼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모두 작금의 미국 현실을 모르고 하는 반응이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 희망대로 미국을 생각하는 버릇에 익숙해진 결과이거나, 언제나 미국은 ‘기회의 땅’ ‘위대한 나라’라고 믿는 고정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현재 미국 유권자들이 뽑는다. ‘보수의 약속’도 바로 그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나온 것이다.

길 잃은 보수가 새로운 진로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보수 정치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하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영국도 그랬다. 전후 30년 이상 지속한 혼합 경제 복지국가 체제를 끝내며 1979년 대처 정부가 출범한 배경에는 결정적으로 보수당 내부의 지적 혁명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조국이면서도 자본주의를 당당히 외치지 못하던 나라, 보수당조차 케인스주의에 물든 나라에서 당 소속 ‘정책연구센터’는 치열한 학습과 논쟁을 거쳐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영국병’의 처방전으로 제시했다. 바로 뉴 라이트 이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가치 및 사회 기강의 부활에 힘을 쏟았다. 가족과 애국을 선양하면서 의존 문화 청산과 더불어 개인의 자조와 근면, 명예를 강조한 것이다. 그 결과 1980년대를 거치며 영국과 보수당은 함께 살아났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보수의 근본 철학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크게 부족한 편이다. 보수 정치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평소에 고민하는 대신 매번 벼락치기 공부나 ‘스타 탄생’으로 선거에 임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다. 국가 대표급 우파 싱크탱크가 없다시피 할 뿐 아니라 연구 기관을 표방하는 당내 조직 또한 대개 선거철에만 바쁘다. 당외(黨外) ‘캠프 정치’는 책사(策士)와 모사꾼이 감초인 왕조시대 사극(史劇)을 닮았다.

1980년대부터 득세한 진보 정치 쪽이라고 하등 나을 건 없다. 젊은 날의 투쟁 경력 부풀리기나 과거사 비틀기, 감성 팔이가 주특기인 가운데 현실보다는 신념, 사실보다는 이념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반(反)지성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대학발(發) 68혁명이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86세대는 이렇다 할 지적 유산 하나 없이 기득권 사수 집단으로 화석화하는 중이다.

보수 정치가 이런 한국 정치의 하향 평준화에 편승하고 안주한다면 실로 무책임한 일이다. 대한민국 보수는 무엇보다 주인 정신과 주류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나라를 세우고 지켰으며, 산업화를 일으키고 민주화의 초석을 깔았으며, 복지국가의 시동을 걸고 세계화의 빗장을 열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지난 세월이 그랬듯 앞으로도 대한민국 보수 정치의 궁극적 경쟁 상대는 세계 속 강대국과 선진국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한국판(版) ‘보수의 약속’이다. 보수 진영부터 제대로 된 연구 개발 정치를 시작하자는 말이다. 그래야 언젠가는 진보 정치도 제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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