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중대재해처벌법 국가 경제 도움 안 돼
전문인력 육성시간 필요…법 적용 유예가 해결책
허현도 중소기업중앙회 부산울산중소기업회장
지난달 31일 검은 옷을 입은 3600여 명의 중소기업인들이 여의도 국회에 모였다. 이날은 임시국회 본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날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마지막 호소를 위해 필자는 부산지역 중소기업인들과 함께 꼭두새벽부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중소기업인들은 “기업이 있어야 근로자가 있고 고용이 있어야 노동이 있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을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끝까지 호소했지만 민생을 위한다는 국회에서 중소기업들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책임하게 외면당했다.
법안처리가 무산되면서 83만 명이 넘는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예비 범법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고물가, 고금리로 산업현장에서 느끼는 중소기업들의 체감경기가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는 와중에 형사처벌에 따른 폐업의 공포를 더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중소기업이 폐업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사업을 할 수 있게 하고, 근로자들도 실직 걱정을 덜고 안전한 일터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국회가 강조하던 민생 문제다. 그러나 중소기업인의 다급한 절규를 정치는 끝내 외면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안전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대표가 영업 관리 등 1인 다역을 하고 있어 장기간의 수사와 재판 등에 따른 대표의 부재는 폐업과 근로자들의 실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실형을 확정받은 사례를 보면 사고 발생일로부터 형 확정까지 약 1년 9개월이 걸렸다. 장기간의 수사와 재판을 거치면서 버텨낼 수 있는 영세 중소기업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걱정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인적 역량, 재정 부족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어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러나 컨설팅을 위한 인력과 인프라의 한계는 쉽게 해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지원은 늦어졌고 그나마 충분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대기업과 달리 전문인력이나 법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중소기업에 처벌이 집중될 우려도 큰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는 산재예방 전담인력을 대폭 확대해 하루빨리 사업장에 산업안전보건체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영세 중소기업의 부담을 완화해 주고, 기업이 스스로 선제적으로 조치할 수 있도록 산재 예방 투자에 대한 세제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지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상 사업장이 83만7000여 개에 달하고, 전문인력도 부족한 상황이기에 당장이라도 지원이 필요한 다수의 중소기업에 지원 혜택이 골고루, 적시에 이뤄지기는 무리다. 게다가 안전 전문인력 육성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결국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가 해법이다. 그래서 중소기업계는 열 번이 넘게 법 적용 유예를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무산 이후에도 경기 광주 등 각 지역에 집결해 준비기간을 늘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은 영세하지만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국가 경제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고금리 고물가 고유가로 박한 이익에 국가 경제의 한 축으로서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내며 중소기업 몫을 감당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근로자의 안전은 매우 중요하다. 기업 현장에서 근로자의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근로자는 기업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자 가족이다.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중소기업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기업 없는 근로자도 생각할 수 없다. 중소기업이 성장해야 그 과실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사업주의 사업 의욕을 꺾는 이 법의 시행으로 정작 근로자가 일해야 할 일터가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할 것이 뻔하다. 중국의 산업 경쟁력 강화로 국내 제조업에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중소기업은 지금보다 더 힘들고 불안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 피해가 근로자들과 중소기업인들에게 돌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정치는 국가 권력을 획득·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타인에게 실과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화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령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혹은 지지한 많은 이들을 배반하는 일이어도 국가 전체를 위한 길이라면 해야 한다.
2월 29일 임시국회 본회의가 개최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법안이 처리돼 중소기업의 다급한 절규에 정치가 화답한 상징적인 사례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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