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의 저랑 같이 신문 읽으실래요] [3] 신문에도 있었다, 다정한 안내자
신문을 거실에 펼치기로 하루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최근 10년간 이공계 대학원생 10만명 엑소더스.” 엑소더스가 뭘까. 맨 앞장부터 차례로 꼼꼼히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기사가 7건이 넘어갈 때쯤 신문을 덮었다. 종이 신문만 읽으면 한 가지 기사를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며 얻은 통찰이 내 삶에 바로 도움을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외였다. 기사 자체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각종 경제 용어에, 정치적 이슈, 정치인 이름 등 모든 게 벅찼다. 이해되지 않으니 읽기 싫었고, 읽기 싫어지자 안 읽은 신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집에 신문이 밀려 있어도 학습지 교사처럼 친절하게 ‘다음 주 쪽지 시험을 칠 거예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외워 오세요’ 하거나, 온라인 수업처럼 ‘학습자님, 아직 늦지 않았어요’라고 말해 주는 다정한 안내자는 없었다. 어려운 데다가 내 편도 없는 느낌이랄까.
‘아니, 근데 난 바본가. 직업이 작가인데 글을 이해 못 한다고.’ 그 생각을 하며 거실에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삼십 대 중 그래도 책은 많이 읽지 않았겠느냐는 막연한 든든함이 든 찰나 구체적 제목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문학이었고 소설이 제일 많았다. 특히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인물 한 명만 잘 따라가면 되는 책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신문에 나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부분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 해당 분야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니 당연한 게 아닐까. 나는 신문에는 명백한 초보였다. 초보면 초보에 맞게 읽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선은 제목만 읽자. 책장 앞 책상에 앉아 눈으로 제목을 읽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니 10분 정도 걸렸다. 제목만 몇 주 내내 읽었다. 이렇게 대충 읽어서 뭐가 되겠냐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당장 내게 가장 죄책감을 줄일 수 있는 선택지였다. 회색 종이가 빳빳할수록 자책은 심해지므로.
그렇게 조금은 구겨진 신문지를 분리 배출하는 게 반복되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서점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눈을 감고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데 좌석 앞에 달린 태블릿 PC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뉴스였다.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다가 멈췄다. 어? 들렸다. 그 이슈들이, 마치 영어 듣기 평가에서 영어 단어가 들리는 것처럼 정치와 경제 뉴스가 내 귀에 들렸다. 묘한 성취감이 생겼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주 큰 변화는 아니지만 뉴스를 조금 이해하게 된 것은 정말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첫 성공이다.
미소 지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신문에도 있었다. 다정한 안내자. 제목. 제목은 내 편이었고 덕분에 신문을 놓지 않게 되었다. 서점 입구로 향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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