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차라리 의사 파업법을 만들자
업무개시명령도 무시 속수무책
철도 파업도 필수인력 남기는데
필수 의료진은 남게 입법이라도
이번 의사들의 의대 증원 반대 집단행동을 보면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선 다른 사안도 아니고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반대하며 파업 등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 놀랍다. 다른 나라에서도 의사들이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일은 있다지만 의사 증원에 반대하며 파업하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 얘기다.
그 결과 응급환자가 치료받을 병원이 없어서 구급차에 실려 ‘뺑뺑이’를 돌고 중환자 수술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일이 의료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단체인 대한응급의학의사회가 일찌감치 “(진료 환경)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응급의료 현장을 떠날 것”이라고 한 것도 이번 사태에서 놀라운 장면 중 하나다. 응급실만은 의사들이 진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곳 아닌가.
의사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동안 집단행동을 할 때마다 정부가 양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 때도 의료계가 대규모 파업에 돌입하자 정부는 수가 인상, 전공의 보수 개선, 의대 정원 10% 감축 등 다양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이 때 정원 감축을 안 했더라면 지금의 의사 부족 걱정을 안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4년에는 정부가 원격의료를 추진하다 의료계가 집단 휴진에 나서자 취소했다. 2020년엔 정부가 10년간 총 4000명의 의대 증원을 추진하자 전공의를 중심으로 전면 파업을 벌였다. 정부는 코로나 기간이라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노환규 전 의사협회 회장은 소셜미디어에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 “의료대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올렸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지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노조법은 철도·병원·통신·항공운수·수도·전기·가스·혈액 등 10가지 사업을 필수공익사업으로 규정하고 파업을 하더라도 필수인력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파업을 해도 공중(公衆)의 생명·보건이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분야는 최소한의 업무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간호사 등이 주축인 보건의료노조는 법적인 파업권을 갖고 있지만 파업할 때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 분만실 등 필수인력은 유지하고 있다. 철도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하더라도 필수 유지 인력 9200여 명을 제외한 약 1만3000명이 파업에 참여하는 식이다. 항공사 노조는 파업해도 운항률을 국제선 80%, 제주노선 70%, 내륙노선 50% 이상을 각각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파업에 돌입하는 일이 드물다. 이런 조항이 노조의 파업권을 제약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우리나라 노조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다.
의사들이 하는 일은 이런 업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직접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보건을 다룬다. 의사 단체들은 노조가 아니어서 파업권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의사들이 협회나 의사단체 결의로 서슴없이 파업에 돌입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파업을 해도 응급실 등 명백한 필수 유지 업무도 가리지 않고 필수 인력 유지라는 개념도 없다. 의료법에 따라 업무개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나 이번 경우에서 보듯 집단으로 거부할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집단 사직 등 형식이니 법적인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의사 말고는 약사, 화물기사에게 업무개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의사들에게 어떻게 환자 곁을 떠날 수 있느냐며 직업윤리를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지금처럼 파업을 몇 년 주기로 반복하고 응급실까지 떠난다면 차라리 의사들에게 파업권을 주면서 파업 절차를 지키게 하고 필수 인력이나마 유지하게 하는 ‘의사 파업법’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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