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간 집밖에 못나왔다”… 좌절빠졌던 日청년, 자선행사 나선 이유 [방구석 도쿄통신]
동반 자선행사로 지진 이재민에 ‘2만326엔’ 기부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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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1일 일본 공영방송 NHK의 간판 연말 가요 프로그램 ‘제74회 홍백가합전’에선 ‘켄다마(けん玉) 챌린지’가 열렸습니다. 켄다마는 통상 탁구공만 한 크기의 공을 실로 이어진 그릇에 던져 안착시키는 일본 전통 놀이입니다. 한국에선 ‘죽방울 놀이’라고 불립니다. 이날 챌린지에는 무려 128명의 이른바 ‘켄다마 히어로즈’들이 출전, 세계 최고 기록인 기네스북 등재를 목표로 했습니다. 참가자 신분은 유명 가수부터 일반인까지 가지각색이었죠. 당시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K팝 아이돌 가수 세븐틴 소속 멤버 버논도 출전해 한국 팬들의 관심도 끌었습니다. 촬영장엔 기네스북 관계자도 자리해 있었습니다.
이날 켄다마 챌린지는 관중들의 성원 속 128명의 참가자들이 한 무대에 가득 찬 진풍경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28명 중 단 한 명의 실수로 물거품이 됐습니다. 당초 챌린지는 한 명이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종료하는 방식이었는데, 현장 관계자들이 16번 순서였던 남성의 실패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128번까지 진행됐어요. 10명째까진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룰이었으나, 그에겐 해당이 안 됐습니다.
거짓말처럼 ‘16번’을 제외한 127명 전원이 공을 그릇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NHK는 기네스북 관계자가 미리 준비한 증서와 함께 ‘챌린지 성공’을 생방송으로 알렸습니다. 하지만 16번 남성이 공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전국에 방영된 이후였죠. 현지 소셜미디어엔 ‘16번이 실패했다’는 게시글이 쏟아졌습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방송사 관계자들이 생방송 도중 “확인에 차질이 있었다”며 다급하게 결과를 번복했습니다.
당시 켄다마 챌린지에 유일하게 실패한 남성은 도쿄에서 활동하는 25살 유튜버 ‘슌상’이었습니다. 2022년 10월 동갑내기 친구와 ‘모시카메 브라더스’란 유튜브 채널을 열고 켄다마 기술을 전수하는 영상을 올려 왔습니다. 지난해 말 NHK로부터 홍백가합전 챌린지에 출연해달란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초 슌상은 챌린지 참가자 중 결원이 생기면 출전하는 ‘보결 인력’이었습니다. 촬영일 전날인 12월 30일 기존 16번 순서 남성이 컨디션 저하로 출전을 포기하면서 급하게 투입됐죠. 불과 하루 전에 받은 통보였지만, 그는 “깜짝 놀랐지만 긴장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성공할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켄다마 기술을 전수하는 유튜버인만큼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일본 아사히신문 계열 주간지 아에라에 따르면, 슌상은 챌린지 실패 직후 대기실에서 참가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도게자(土下座)’로 사과했다고 합니다. 동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으나, 현지 소셜미디어엔 ‘16번 남성’에 대한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그는 촬영일로부터 사흘 지난 지난달 3일까지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이불 속에만 틀어박혀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소셜미디어에 ‘켄다마 16번에게’란 한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게시자는 니가타현 묘코시에서 라멘집을 운영하는 나가타 고타로(43)씨. 그는 슌상을 향해 “우리 매장에 오면 무료로 라멘을 대접할게요. 기운 내세요!”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게시글은 많은 ‘좋아요’를 받으며 퍼졌고 결국 슌상에게도 닿았습니다. 슌상은 “꼭 가게에 가고 싶다”고 용기 내 연락했고, 나가타씨는 그가 챌린지 실패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켄다마를 이용한 ‘자선 행사’를 제안했습니다.
이후 일본 인터넷에도 ‘16번 남성’에 대한 응원의 게시글이 차차 올라오며 슌상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유튜브 활동도 재개했죠.
그가 나가타씨 가게를 찾은 것은 지난 24일. 나가타씨와 슌상은 100엔(약 900원) 이상을 기부하면 켄다마에 도전할 수 있는 이벤트를 가게 앞에서 열었습니다. 성공하면 500엔분 식사권 혹은 아이스크림 교환권 등을 제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슌상 방문에 앞서 자선 행사를 연다는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예상보다 많이 가게를 찾으면서, 총 155명으로부터 2만326엔이란 돈이 모였습니다. 자식과 함께 찾은 부모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슌상을 만나 “앞으로도 힘내라”라는 등 지난해 챌린지 실패에 대한 위로를 전했습니다.
시나노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슌상과 나가타씨가 모금한 2만326엔은 니가타현 인근 이시카와현에 전액 기부됐습니다. 이시카와현엔 새해 첫날이었던 지난 1월 1일 규모 7.6 강진이 발생해 현재까지도 많은 이재민이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부액은 이곳 이재민들을 위해 쓰일 예정으로 알려졌습니다.
나가타씨는 “홍백가합전을 보고 나서. ‘16번 남성’에게 ‘우울해할 일이 아니다. 모두를 대신해 1년의 액운을 씻어줘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자선 행사를 마치고, 슌상은 약속대로 나가타씨 가게에서 라멘을 대접받고 귀가했습니다.
2월 28일 스물일곱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전통놀이 기네스북 등재에 실패해 전 국민 야유를 받았던 20대 청년과, 야유 대신 그를 따뜻하게 북돋아준 한 라멘집 사장의 사연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25~26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인종문제로 시작해 불륜으로 끝났다...日미인대회 뒷이야기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2/14/IYNA432OYREXDKPTAWFP34653A/
“난 일회용 인간이었다”...’완전 재택’한다는 유령회사에 당한 일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2/21/C4PUDQCIUBH63DSOSLAP2A5W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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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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