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동 사는 봄날아빠를 아세요?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서영동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서영동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일곱 편의 짧은 글로 구성됐습니다. 한편 한편은 서영동에 사는 각각의 가족(또는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독립된 글은 아니고 서로 얽혀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이룹니다. 다양한 인물들 모두 서영동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다보니, 마치 서영동이 지리적 위치 또는 행정 단위의 명칭이 아닌 유기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지난 칼럼에서 살펴본 존 란체스터의 <캐피탈>에서 영국 런던의 ‘피프스로드’가 소설의 무대를 넘어서서 주인공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합니다.
적어도 세 명의 후보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서영동은 피프스로드와 마찬가지로 가상의 동네입니다. 주민들이 ‘서영동 학군 강남 못지않다’고 주장하고, ‘마포·용산보다 못한 게 뭐냐’고 집값을 푸념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강남 3구’나 이른바 ‘마용성’에 위치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디지털단지에서 멀지 않고 이름이 서영동인 것으로 보아 구로구나 영등포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강남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예전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의 영동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추측이 터무니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굳이 서영동이 어디일까를 따져본 것은 사람들이 주택 가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희열과 분노 또는 공포를 느끼고, 학군과 교통 개선을 요구하고, 심지어 기피시설 저지까지 나서는 일이 강남이나 분당 같은 초고가 아파트가 집중된 지역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남주가 부동산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강남 투기’를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집값 상승 열풍에서 다소 비켜나 있는 서울 남서부 지역의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목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은 2018년 네이버 ‘서사사’에 올라온 포스팅으로 시작합니다. ‘서사사’는 서영동 지역 친목 카페로 ‘서영동 사는 사람들’을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회원명 봄날아빠는 2년 전 서영동 동아1차 아파트를 매수했는데 아직도 가격이 그대로라며 분통을 터트리고 화살을 지역의 부동산중개업소로 돌립니다. 또 서영동 학군이 강남 못지않고, 동아1차 방향으로 지하철 서영역 출구가 추가돼야 한다는 글을 잇달아 올립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성실하게 일군 자기 자산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파트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던 시기라 서사사 회원들은 모두 봄날아빠의 포스팅에 주목하고 술렁입니다. 그리고 봄날아빠가 누구일까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온라인카페의 특성상 봄날아빠가 스스로 신원을 밝히지 않는 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설에는 적어도 세 후보가 등장합니다.
나도 속물일까, 부끄러워하는 인물들
동아1차에 사는 용근은 서영동 부동산업체들이 집값 후려치기를 한다고 불만이 많습니다. 게다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 이름이 새봄입니다. 용근이 속한 조기축구회 멤버들은 봄날아빠가 새봄 아빠라고 생각합니다. 경화도 중학생인 아들 찬이와 함께 동아1차에 삽니다. 대치동 출신으로 외고와 연세대를 나왔고 은행원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서영동에서 가장 잘나가는 입시학원 원장입니다. 경화는 ‘서영동처럼 애 공부시키기 좋은 동네가 없다’고 입이 닳도록 말합니다. 찬이 엄마를 아는 동네 학부모들은 모여서 ‘온라인에 성별 표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봄날아빠가 여자일 수도 있겠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승복이 지금 가장 꽂혀 있는 것은 동아1차 아파트 쪽으로 서영역 출구를 하나 더 내는 것입니다. 자비로 현수막을 걸고,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지지 서명을 받고, 국회의원 사무실에 수없이 민원을 넣는 바람에 ‘블랙컨슈머’로 찍혔습니다. 환갑을 넘은 승복은 청년 시절부터 40년간 서영동에서 살았습니다. 재산 한 푼 없이 상경해서 처음 취직한 곳이 서영동 연탄 공장이었습니다. 성실하고 억척스러웠던 승복은 20년간 공장을 다니며 쪽방 기숙사에서 단칸 전세방으로 그리고 매입한 낡은 주택으로 옮겨다녔습니다. 또 분양받고, 낙찰받고, 매매한 아파트로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재산을 키웠습니다. 가족 앨범은 ‘서영동 아파트 변천사’라고 해도 될 만큼 주공, 우성, 현대, 대림까지 서영동의 여러 아파트에 살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승복이 늘 외치는 ‘평생 성실하게 일군 자산의 가치를 지키는 재산권 수호’와 지하철역 출구 신설 요구에서 봄날아빠의 주장을 재발견합니다. 하지만 승복이 동아1차가 아니라 인근 현대아파트에 사는 터라 봄날아빠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승복이 재작년에 동아1차 32평을 하나 더 매입해서 결혼한 딸에게 전세를 주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조남주는 ‘작가의 말’을 통해 <서영동 이야기>를 쓰는 내내 무척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다고 토로합니다.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 인물들도 힘들어합니다. 새봄 엄마 은주는 다른 엄마들처럼 교육에 관심이 많고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다른 아이가 내 아이를 해코지하지나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한편으론 그런 극성 엄마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승복의 딸 보미는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현장의 맨얼굴과 속마음을 생생하게 담아낸다며 아빠의 아파트 편력기를 촬영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승복이 ‘아빠 너무 속물 같아? 투기꾼 같아?’라고 묻자 얼굴이 빨개집니다. 결국 속물 같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아버지만큼이나 속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집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욕망
학원 옆에 ‘치매 시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경화에게도 시련이 닥칩니다. 학원 영업에 방해될까 전전긍긍합니다. 학원연합회장이었던 경화는 현대아파트 입주자대표 승복과 함께 치매 시설 결사반대 투쟁을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경화를 키웠고 지금 손주인 찬이를 돌봐주는 친정엄마한테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재산과 개인적 감정 사이에서 경화는 혼란스럽습니다.
조남주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일각에서 ‘너무 극단적 인물과 사례’를 소설에 쓴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소설이 ‘평균적인 모습’을 다뤄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부동산 광기’라는 자극적인 사건조차 아주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또 투기에 몰두하는 인물이 오로지 돈만 밝히는 악의 화신이 아니며, 속물근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도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모순을 잘 보여줍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다. 2주마다 연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