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못 읽겠다면 어쩔 수 없어"...82세 현역 소설가 윤흥길의 '담대한 배짱'
“독자에게 불친절한 문장 일부러 썼다“
내년 조선 말 배경 장편소설 집필 계획도
“얼음 조각을 쪼아 만든 듯 별들만이 뾰쪽뾰쪽 섬뜩하게 빛나는 밤이었다”라는 첫 문장을 쓰고 ‘끝’이라는 한 글자를 적기까지 30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올해 비로소 마침표를 찍은 소설가 윤흥길(82)의 대하소설 ‘문신’의 이야기다. 2018년 1~3권을 냈고, 이듬해 완간 예정이었으나 올해에야 마지막 두 권이 나왔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라는 혼란기를 틈타 천석꾼이 된, “이기는 놈 내 편”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는 최명배 영감과 그를 따르지 않는 자녀들의 삶을 통해 “환란으로 날이 밝고 환란으로 날이 저무는” 시대의 한반도를 묘사한다. 문신이라는 제목은 전장에 나가는 이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몸에 흔적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에서 왔다.
27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문신’ 완간 기자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작품에 따라붙은 ‘필생의 역작’이라는 수식어를 수긍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차기작으로 조선 말기에 대한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내년부터 집필할 텐데, 만약 그 작품이 나오고 다시 필생의 역작이라고 하면 꼴이 우스우니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는 그렇다”라는 것. 80대 ‘현역’ 소설가다운 경륜이었다.
필생으로 쓴 ‘불친절한’ 소설
문단의 거장을 향한 관례적 찬사가 아니다. 윤 작가에게 이번 작품은 ‘생명의 마지막까지 다함’이란 의미의 필생 그대로였다. 그는 “막판에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작품을 제대로 끝낼 수 있을지 (걱정했고), 또 쓰다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심혈관 질환으로 집필에 어려움을 겪은 윤 작가에게는 더 이상 글쓰기를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의 고통도 세 차례나 찾아왔다. 완간까지 애초 계획보다 5년이 더 걸린 이유다. “몸의 괴로움보다 (소설을) 못 써서 받는 스트레스로 더 고생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윤 작가는 “나이도 많고 앞으로 작품을 쓸 기회도 많이 없으니 독자에게 불친절해지자”고 일부러 마음먹었다. 원고지 6,500매의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생경한 토속어와 옛말이 빼곡하다. 그는 “판소리 율조를 흉내 내려고 어순을 바꾸고 조사나 토씨를 많이 생략했더니 (독자로부터) ‘문장이 왜 이런가’라는 불평도 들었다”고 말했다. 가독성을 외면하고서라도 “민족 정서의 하나를 이루는 판소리와 그 안의 토속적인 정서를 많이 나타내려고 했다.”
진입장벽을 낮추는 건 특유의 ‘해학’이다. 누구보다 먼저 창씨개명한 최명배 영감이 선영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야마니시 아끼라’라고 고하려다 “후손을 조상님들이 전연 못 알아보는 불상사”나 “성씨를 일개 후손이 임의로 갈아치운 전대미문의 만행”을 우려하는 대목에선 차마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최 영감의 장남이자 폐결핵 환자인 부용이 마음에 둔 여성을 밀어내려 내뱉는 “결혼 적령기를 쪼깨 넘어선 감은 있지만, 그 정도 흠결이사 타고난 미태로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을 거요”라는 대사는 거절인지 추파인지 헷갈릴 정도다.
“소설 안 쓰면 사는 맛 안 나”
“큰 작품 쓰라”던 박경리 소설가의 당부에서 시작된 자신의 대하소설을 윤 작가는 ‘중하소설’이라 부른다. 10권 이상의 3부작 소설을 구상했지만 “큰 작품은 긴 작품이 아니라 인간과 일생, 사회에 깊은 애정을 갖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박 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을 놓고 계획을 줄이고 줄여 결국 ‘문신’ 5권이 됐다는 것이다.
“독자가 끝까지 못 읽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도 이 소설은 세상에 나와야만 했다고 윤 작가는 말했다. 한 나라의 문학이 패션의 유행처럼 하나로 쏠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문학이 골고루 많이 나오고 읽힐 때 문학 풍토가 풍요로워지고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
1968년 한국일보로 등단, 올해 등단 56년 차를 맞았지만 여전히 “작품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사는 맛도 안 나고 너무나 재미없는 세상이 된다”는 윤 작가다. 소설 속 ‘밟아도 아리랑, 밟아도 아리랑, 죽지만 않으면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는 한민족의 끈덕진 귀소본능을 상징하는 노랫말은 작가의 문학을 향한 의지와도 닿아 있다. “소설을 쓰고 창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윤흥길 소설의 마침표는 아직 찍히지 않았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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