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 목소리 공연에 반영하니 팬덤 생겨"
서울시무용단 '일무' 등
산하 예술단 공연 제작해
219억원 역대 최대 수입
국내 첫 공연장 구독서비스
순식간에 매진되며 '대박'
세종문화회관 객석에서 날카로운 눈을 빛내는 백발의 신사를 본다면 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임기 3년 차인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다. 예술의전당 개관 준비부터 시작해 20여 년간 공연기획·예술사업부 등을 거쳤고, 이후 서울문화재단 대표, 국립극장장,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한 예술 행정 전문가다. 대학 졸업 후 예술의전당에 입사했던 1984년 3월로부터 꼬박 40년인데, 그는 여전히 집무실뿐 아니라 객석 현장을 지킨다. "공연을 안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다. "우리 단체가 기획한 건 다 봐야 하고, 화제가 되는 것도 봐야죠. 보지도 않고 기획하거나 욕심낼 순 없으니까요."
오랜 시간 쌓은 원칙과 노하우를 발휘하면서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자체 수입 219억원을 달성했다. 200억원 돌파는 1999년 법인화 이후 24년 만에 처음이다. 또 연초 새롭게 선보인 '2024 세종시즌' 구독권도 총 800매가 일순간에 매진되며 대박을 터뜨렸다. 최근 집무실에서 만난 안 사장은 "이 일을 하다 보니 '관객은 훨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몰라보고 있다가 너무 늦었구나'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에도 관객의 요구와 욕망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뜨겁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구독권은 연간 3만9600원(월 3300원)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제작한 뮤지컬·오페라·국악·연극 등 총 28개 공연을 최대 40% 할인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이는 앞서 '제작극장으로의 전환'이라는 경영 방침이 성과를 낸 덕분에 가능했다. 흥행이 보장된 공연의 대관을 줄이고 소속 예술단의 창작 역량으로 극장을 채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해 서울시무용단의 '일무', 서울시뮤지컬단의 '다시, 봄', 서울시극단의 '키스' 등 매진 공연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예술단 자체 공연의 관객 입장 수입이 전년 대비 57% 늘었다. 목표 예상 수입을 달성한 것도 지난해가 처음이었을 정도다.
제작극장은 더 큰 그림에서 보면 '팬덤 구축'을 위한 포석이었다. 사실 안 사장이 취임한 2021년 10월, 세종문화회관은 코로나19 여파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극장을 찾고 또 찾는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게 절실했다. 안 사장은 내부 분석과 컨설팅 등을 통해 관객 수요 데이터를 분석하는 공연DX팀을 지난해 신설했다. 더 친밀하고 젊은 세종문화회관을 만들기 위한 해법 중 하나다. 때마침 2022년 하반기 광화문광장이 재개장하면서 주변 일대가 시민 문화 향유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도 주효했다.
세종문화회관 개보수도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면 2026년 철거·착공에 들어가 개관 50주년을 맞는 2028년 말에 리노베이션을 마치게 된다. 안 사장은 "요즘 공연장이 백화점, 리조트 등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관객 접근성을 높이고, 공연과 함께 더 다양한 즐길 거리, 먹거리를 제공한다면 차별성 있는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 사장은 자타공인 공연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지만, 40년 전 처음 공연예술계에 발을 들였을 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일이 숱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한 후 특출난 예술적 조예 없이 공채로 입사했다. 그러다 예술의전당 공연장 건축의 조율 업무를 담당하게 됐고, 독학으로 해외 유수 공연장의 경영 자료를 공부하면서 공간과 콘텐츠 운영 원리에 눈을 떴다.
안 사장의 공연기획 경력엔 1999년 오페라하우스 조용필 콘서트, 말러 교향곡 시리즈, 2012년 국립극장의 창극·한국무용 레퍼토리 도입 등 성공 사례가 많지만, 그 시작은 1994년 한 어린이 연극이었다. 예술의전당 공연기획부에 처음 발령받아 맡은 호주 어린이 극단 REM의 '소녀 와얀의 모험' 내한 공연이다. 당시 어리바리 '안 차장'은 지지부진한 예매율에 도움이 될까 싶어 '영어 교육'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곧장 영어 학습지 '윤선생'의 방문교사 관리 지점을 골목골목 찾아다니면서 입소문을 냈다. 초등학교 졸업식 단상에 올라가 직접 홍보하기도 했다. 결과는 매진. 그는 "서초동 인근 주민뿐 아니라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등에서 학부모와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교육에 대한 열망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회상했다. 그때 "공연장에 오는 관객 한 명 한 명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 1000명을 부르려면 1000가지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새겼다. 그의 목표는 앞으로도 공연 그리고 공연장이다. 처음 예술의전당이 개관할 때부터, 세종문화회관의 50주년 리노베이션을 준비하는 지금도 늘 그의 관심사는 '누가 이 공간의 주인이 될 것인가'다. 안 사장은 "미래의 관객과 예술가가 이곳에서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하며 일할 때 제 스스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낀다"고 했다. "좀 더 욕심낸다면 재능 있는 우리나라 예술가를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역량을 끌어내는 매니지먼트 일을 하고 싶어요.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는 건 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에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위로받고 치유할 수 있게 되겠지요."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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