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직접 대결’ 꺼려온 유럽, 기류 전환? 우크라 파병론 ‘솔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도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꺼려왔던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파병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확전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파병 시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직접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고, 나토는 “파병 계획이 없다”며 진화를 시도했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지상군 파병’을 둘러싼 논의는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중 일부 국가가 우크라이나에 자국군을 파병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피초 총리는 이날 TV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 자국 군대를 보내고 싶어하는 나토 및 유럽연합(EU) 국가들의 양자 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집권에 성공한 피초 총리는 EU의 대러 제재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친러·반서방 성향으로 분류된다.
슬로바키아 총리 “나토·EU 일부 국가 파병 검토”…마크롱 “배제 안 해”
피초 총리의 이 같은 ‘깜짝 발언’은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각국 지도자 등 20여명이 참석하는 우크라이나 지원 국제회의를 앞두고 나왔다. 피초 총리는 이 회의를 “전투 회의”라고 지칭하며 유럽 국가들이 실제 파병을 단행할 경우 “엄청난 긴장의 고조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를 제안하고 주최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지상군 파병 문제가 논의된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회의를 마친 뒤 피초 총리의 발언에 대한 취재진 질문에 “지상군 파병에 대한 내용도 자유롭게 논의가 됐지만 오늘 그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는 없었다”면서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러시아가 승리하지 못하도록 필요한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지난 2년간 나토가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최대한 피해온 것과는 달라진 기류다. 미국과 유럽 등 나토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면서도, 확전을 우려해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지 말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거는 등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여 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최근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피력하면서도 “나토나 나토 동맹국 모두 분쟁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우크라이나의 ‘오랜 숙원’인 나토 가입 문제와 관련해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최소한의 ‘가입 확답’조차 해주지 않고 있는 것도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해선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토는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전체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무력 등 원조를 제공하는 ‘집단방위 체계’를 운영한다.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은 확실한 ‘안전 보장’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나토 입장에선 러시아와 직접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의미한다. 당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는 러시아가 ‘나토의 동진’을 막겠다며 전쟁을 시작한 주된 명분이기도 했다.
러 발끈…“유럽이 전쟁터 되는 것 유럽 시민도 원하지 않을 것”
유럽 일부 국가들이 파병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7일 브리핑에서 “나토 회원국이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대화는 나토와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전투병력을 파견할 계획이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AP통신 인터뷰에서 “나토 동맹국은 우크라이나에 전례 없는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며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나토 전투군을 배치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안보 위기감이 커진 폴란드, 체코 등 나토 동부전선 국가들도 파병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회의에서 (파병에 관한) 각기 다른 의견들이 있었으나, 파병 결정은 절대 없었다”고 강조했다.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도 “체코는 우크라이나에 어떤 군인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피초 총리 역시 회의가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자국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보낼 준비가 된 국가들도 있었으며, 슬로바키아를 포함해 절대 안 되는 국가, 이런 제안을 고려해보겠다고 밝힌 국가들이 있었다”면서 회의에서 입장 차가 있었다고 밝혔다. 다만 파병을 검토 중인 국가가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는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폴란드, 네덜란드, 스페인, 핀란드 정상과 영국, 캐나다, 미국 장관급 인사들이 참여했다.
아울러 회의에선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와 함께 유럽이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는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결정하기 위해 미국 대선 결과를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위태로운 것은 유럽의 미래이므로 결정도 유럽인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무기고 빈 유럽, 포탄 ‘역외 조달’ 논의 박차
유럽의 포탄 생산·비축량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무기의 ‘역외 조달’ 논의도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EU는 오는 3월까지 우크라이나에 155㎜ 포탄 100만발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생산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약속한 분량의 30% 정도만 지원이 이뤄진 상태다.
그간 체코는 유럽 외 제3국으로부터 EU가 포탄을 구입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자고 주장해온 반면, 프랑스는 유럽 자체 군수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며 이에 반대해 왔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이날 회의 후 네덜란드가 해외 무기 구입을 위해 1억유로(약 1445억원)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도 “우리의 목표는 효율성이며, EU가 아닌 국가들에 해결책을 찾도록 요청할 것”이라며 유럽산 포탄 지원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뤼터 총리는 유럽 외 일부 국가들로부터 군수품 조달을 약속받았지만, 조달 국가가 어디인지는 해당 국가가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며 밝히지 않았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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