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驛舍)로 가자[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기자 2024. 2. 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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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은 역, 역세권


intro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구극(究極)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김무곤 교수 ‘종이책 읽기를 권함’ 중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늘 자신의 쓸모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2011년 겨울.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어떠한 용도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읽기라니! ‘별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읽는 행위’ 위에는 시간이 나이테처럼 축적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쓴다. ‘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그 스물한 번째는 박은주의 ‘역사를 품은 역, 역세권’(미디어샘)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숲세권, 스세권, 시세권, 붕세권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말은 숲, 스타벅스, 시장, 붕어빵 등의 말에 ‘역세권’이란 단어를 붙여 쓰는 신조어다. 그만큼 역세권은 그곳의 가치를 높여주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역세권에 집을 사려면 우리는 은행 대출이라는 부채를 떠안게 되는데, 박은주 작가의 책 ‘역사를 품은 역, 역세권’을 읽다 보면 나라와 시대에 대한 부채를 가지게 된다. 이 나라 국민은 이래저래 부채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을 뒷받침해 줄 때가 많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기록과 흔적이다.”

TBS 방송국 PD인 저자 박은주는 역사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 건축과 책, 교육과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직접 취재하고 만났던 사람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만의 이야기 또는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고,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고등적인 욕구다.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일을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책을 쓰다니, 이런 경우를 덕업의 일치라고 하는 거다. 그녀의 직업이 부럽기까지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비범한 이야기를 전하는 그녀가 내게는 더없이 비범해 보였다.

띄엄띄엄이긴 하나 서울에서 15년 정도 살아온 내가 서울에 대해 이렇게나 무지했나 싶어 괜히 무안하기도 했다. 20대 후반에 숙대입구역이 있는 갈월동에 살면서 효창공원으로 운동하러도 가고, 근처 남영역에도 자주 갔었는데, 주변에 ‘삼의사묘’ 나 ‘대공분실’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역세권에 자리한 열일곱 군데의 역사적 공간의 숨겨진 이야기, 알면서도 진실로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국가로부터 기본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한 성매매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어떤 사람도 함부로 폭행당하고, 죽임당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세월이 간다’고 우리는 말한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눈이 그치고, 사람은 늙고, 강물은 흐른다.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시간의 영속성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정신’일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순이’(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일명 공순이, 차순이, 식순이로 불렸던 여성 근로자들을 일컫는 말)들이 존재한다. 어딘가에는 수많은 박종철이, 이한열이, 윤금이가 있을 것이다. 약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을 그동안 보이지 않아서 몰랐다는 변명 대신 이제 우리는 그들의 정신에 대해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서로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부채를 갚는 방법이 아닐까.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에 가면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있다. 미국 유학 중 불의의 사고로 떠난 딸을 가슴에 묻으며, 진아의 부모는 서울시와 자치구에 사재 50억원을 기증해 도서관을 지었다. 준공식 날 아이 손을 잡은 한 아주머니가 진아 아버지에게 CD 한 장을 건넸다고 한다. 그 안에는 매일매일 한자리에서 찍은 완성돼 가는 도서관의 모습이 84장의 사진으로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는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도서관의 사연을 듣고 마음이 아팠고, 진아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도서관이 세워지는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는 거다. 사진을 찍은 아이 엄마와 박은주 PD는 결국 같은 일을 한 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흔적이라도 보존하고 싶은 작디작은 소망이었다. 소명을 가진 누군가의 작은 노력이 오늘날 역사의 자취로 남게 되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기록하면 기억하게 되고 기억하면 마침내 역사가 된다.

김윤정(서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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