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168> 골프의 명언을 찾아서, 벤 호건 ②] 교통사고 후 기적의 복귀…“완성으로 가는 길에 지름길은 없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2024. 2. 2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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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나의 인생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골프를 하러 갔다(Golf was my life. I didn’t want to give it up. So I went to work!)!”

“당신의 이름은 당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절대 이름을 더럽히거나 값싸게 하는 짓을 하지 말라(Your name is the most important thing you own. Don’t ever do anything to disgrace or cheapen it).”

벤 호건은 어떤 역경에도 꺾이지 않는 골퍼였다.

1949년 2월 2일. 피닉스 오픈 연장전에서 아쉽게 우승을 놓친 벤 호건은 아내 발레리와 함께 차를 몰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 좁은 다리를 건너던 그의 차는 맞은 편에서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침범해 달리던 관광버스(그레이하운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주저 없이 핸들을 놓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던졌다. 덕분에 아내는 큰 부상이 없었다. 그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핸들은 운전석 시트를 뚫어버렸다. 당시 서른일곱의 나이에 프로골퍼로서 전성기를 달리던 호건은 대퇴부와 쇄골, 발목, 갈비뼈 등 11개의 뼈가 부러지고 심각한 내출혈 등 끔찍한 상처를 입었다. 벤 호건은 수술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의사는 “다시 걷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호건은 병상에서도 클럽을 들고는 샷을 하기 전 좌우로 흔드는 동작인 왜글(waggle)을 반복했다. 몸무게가 43㎏까지 줄어도 “나는 돌아갈 것”이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1 퍼팅하고 있는 벤 호건. 2, 3 벤 호건이 1950년 LA오픈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하고 있다. 사진 위키미디어

“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59일 뒤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호건은 7개월 뒤 연습을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재활을 거듭한 그는 이듬해 1월, 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LA오픈에 출전했다. 이 대회는 매년 2월 한국의 현대차 브랜드인 제네시스가 후원하고, 타이거 우즈 재단이 개최하는 PGA투어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로 이어지고 있다. 대회 코스인 리비에라는 호건이 1947년과 1948년 LA오픈을 우승하고, 1948년 US오픈도 우승한 안방 같은 곳이었다.

첫날부터 9000여 명의 갤러리가 모여 호건의 복귀전을 지켜봤다. 다리 쪽으로 피가 몰릴까 봐 고무밴드로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단단하게 감고 나선 경기였다. 대회 기간 자주 비가 내려 코스가 미끄러운 악조건 속에서도 호건은 놀라운 선전을 이어갔다.

호건은 우승 문턱까지 갔지만 샘 스니드(1912~2002)에게 연장 접전 끝에 졌다. 호건과 동갑인 스니드는 타이거 우즈와 나란히 PGA투어 최다승 타이기록(82승)을 지닌 승부사다.

당시 연장전은 요즘처럼 한 홀이나 몇 개 홀에서 치르는 서든 데스 방식이 아니라 최종 라운드 다음 날 18홀 경기를 치러야 했다. 계속되는 비로 1주일 넘게 연기된 끝에 열렸다. 골프장의 모든 팬이 대회 내내 불사조 같은 호건을 따라다니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기적 같은 복귀전을 치른 호건은 결국 그해 열린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은 기적 같은 우승 스토리를 썼다. 195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아드모어의 메리언 골프클럽에서 열린 US오픈. 호건은 4라운드 길고 까다로운 마지막 18번홀(파4·485야드)에서 파를 지켜야 연장전에 나설 수 있었다. 호건은 티샷을 페어웨이 한가운데 보내고 213야드를 남겨 놓고 1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을 그린에 올려 2퍼트로 파를 지켰다. 수많은 갤러리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린을 향해 1번 아이언을 날리는 샷은 골프의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호건은 이튿날 세 명이 벌인 18홀 연장전에서 1언더파를 쳐 3오버파를 친 로이드 맹그럼과 5오버파를 친 조지 파지오를 누르고 US오픈 트로피를 획득했다.

호건은 당시 1번 아이언 샷을 두고 “사실 열두 살 때부터 연습해온 샷”이라고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사용하는 골퍼가 거의 없는 까다로운 1번 아이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은 호건이 늘 강조하는 연습의 힘이었다. 경기 중 필요한 모든 샷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호건은 “완성으로 가는 길에 지름길은 없다(There are no shortcuts in the quest for perfection)”고 했고 “가장 큰 즐거움은 향상을 통해 얻어진다(The greatest pleasure is obtained by improving)”고 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인 라운드”

호건은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사고 이후 1년에 열 차례가 되지 않는 PGA투어에 나가면서 11승을 더 거뒀다. 그중 여섯 차례가 보통 대회보다 열 배는 더 어렵다는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다. 그는 부상 1년 뒤인 1950년 US오픈에서 우승했고, 1951년 마스터스 첫 우승과 US오픈 세 번째 우승을 일궜고, 1953년에는 마스터스, US오픈, 디오픈 등 3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했다. 모두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한 가장 어두운 순간, 위대한 호건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이 같은 호건의 길을 걷고 싶어 한다. 집에서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대회에 출전하다 메이저 대회에 나서는 방식이다.

호건은 1953년엔 마스터스와 US오픈, 디오픈 등 세 개 메이저 대회를 휩쓸었다. 당시 PGA챔피언십은 디오픈과 일정이 겹치기 때문에 이 해 호건이 기록한 메이저 대회 3승은 사실상 한 해 메이저 대회를 모두 휩쓴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트리플 크라운’이라 불렸다. 호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간 디오픈에서 우승하고 미국으로 돌아오자 15만 명의 뉴욕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색종이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뉴욕시의 색종이 카퍼레이드는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같은 국가 영웅들에게 이뤄지는 축하 행사였다. 골퍼 중에는 한 해에 4대 메이저 우승을 이뤘던 보비 존스와 벤 호건만 이런 경험을 했다. 호건은 말했다.

“인생의 페어웨이를 걸으면서 장미 향기도 맡아야 한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인 라운드이기 때문이다(As you walk down the fairway of life, you must smell the roses, for you only get to play one 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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