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없는 사진 거장의 전시···"이것은 사진이 아니다'

서지혜 기자 2024. 2. 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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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직물을 가득 채운 곰팡이 포자 무늬.

작품은 황홀하고 아름답지만 '사진'은 아니다.

독일의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66)의 전시회인데 전시장 어느 곳에서도 사진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에는 카메라가 사용되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사진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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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토마스 루프 개인전, 'd.o.pe' 개최
사진 대신 디지털 이미지 활용한 신작 소개
[서울경제]

커다란 직물을 가득 채운 곰팡이 포자 무늬. 작품은 황홀하고 아름답지만 ‘사진’은 아니다. 독일의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66)의 전시회인데 전시장 어느 곳에서도 사진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작품 어디에 카메라가 사용된 것이냐”고 물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는 카메라가 사용되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사진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토마스 루프가 자신의 신작 ‘d.o.pe’ 연작을 아시아 최초로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공개했다. 지난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 이후 한국에서 20여 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그간 자화상, 과학사진, 보도사진 등 사진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수많은 혁신을 선보인 작가의 또 다른 ‘디지털 파격’을 볼 수 있는 자리다.

PKM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토마스 루프. 그는 20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d.o.pe’를 열었다. /연합뉴스

이번 전시에 작가가 출품한 작품은 ‘카펫’이다. 카펫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잔뜩 놓여 있다. 언뜻 보면 곰팡이 포자나 물 위에 번진 유화 물감처럼 보이는 ‘프랙털(fractal)’ 이미지다. 프랙털은 컴퓨터 그래픽 용어로, 작은 형태가 자신과 닮은 형태를 끝없이 증식하는 구조를 말한다. 전체의 형태가 작은 형태와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전시장에 걸린 카펫 중 일부는 약 290cm에 달한다. 바로크 시대의 궁전 벽지 무늬가 연상될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다. 작가는 각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이 패턴을 염색하듯 카펫 위에 출력했다. 특히 하나의 패턴이 아닌 여러 개의 패턴을 다양하게 합성해 이미지는 심해의 산호가 뒤엉킨 듯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작가는 칸디다 회퍼, 토마스 스트루스 등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 멤버다. 과거 작가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사진이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고 현실을 잘 반영하는 사진을 찍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작업이 반복될수록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현실 역시 사실은 연출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 구성물의 위치를 기획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피사체를 찾아다니는 과정 자체가 연출이라는 것. 그 후 그는 신문사진(Zeitungsfotos)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데이터를 수집한 이미지, 일본 만화책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인화한 ‘서브스트라트’ 연작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사진 실험을 이어갔다. 이번 ‘d.o.pe’부터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를 인화지가 아닌 카펫에 출력하는 ‘이미지 작업의 극단’을 선보인다.

토마스 루프의 ‘d.o.pe’. 사진 제공=PKM갤러리
토마스 루프의 ‘d.o.pe’. 사진 제공=PKM갤러리

작가는 캔버스 대신 카펫을 선택했다. 카펫에는 이미지가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재의 고유한 특성 덕분에 관람객이 이미지에 빠져드는 듯한 깊이감이 생긴다. 카메라와 인화지가 사용되지 않았으니 이 작품은 당연히 사진이 아니다.

정체성이 ‘사진 작가’였던 토마스 루프가 사진을 버린 것일까. 작가의 설명은 오히려 반대인 듯하다. 작가는 “사진은 기술적인 매체이고 기술은 2000년 이후 항상 개선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지금) 그 개선의 방향이 디지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스승인 베른트 베허는 ‘어떤 매체로 작업한다면 우리의 작품에 그 매체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며 “동시대 사진가, 사진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로서 기술적인 문제를 사진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 시대에 프랙털과 같은 이미지 생성은 몇 번 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한 것 아닐까. 작가는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AI는 학습된 이미지 이상의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며 디지털화와 AI의 차이를 설명했다. 전시는 3월 13일까지.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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