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장 후분배’ 낡은 철학을 깨다…복지-경제 예산 역전

한겨레 2024. 2. 2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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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55화 성장이냐 분배냐
복지예산 비중 20%→28% 높여
보수언론 “성장 팽개친다” 비판
성장지상주의 경제관의 유산일 뿐
지금도 33% 그쳐…50% 넘어서야
복지전달체계 미비탓 체감도 낮자
사회복지사 1800명 늘리기로
공무원 증원 반대하던 이해찬 총리
거듭된 건의에 결국 동의
일해 돈 벌수록 지원 줄어드는
‘빈곤의 함정’ 해결하려 EITC 도입
이헌재 부총리 “좌파 정책” 비판
노 대통령 직접 나서 “합시다” 결론
2004년 11월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방안’을 주제로 제56회 국정과제 회의를 열고, 근로장려세제를 2007년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 (대통령 오른쪽으로)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대통령 왼쪽으로)이해찬 국무총리,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참여정부는 5년 내내 야당, 언론, 보수 학계로부터 성장보다 분배에 치중해 경제를 망친다는 공격을 받았다. 주요 표적은 나였다. 역대 청와대 참모나 장관 중 최초로 내가 분배가 중요하다고 늘상 주장하니 그들은 나를 좌파, 분배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2015년 경부터 세계 경제학계의 조류가 변했다. 분배를 개선해야 성장이 된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 보고서를 시작으로 지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노동기구(ILO), 세계은행, 심지어 다보스 포럼까지 이를 정설로 인정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선구자였다.

2004년 5월7일(금) 송대희 조세연구원장이 찾아와 조세, 예산구조의 국제비교 자료를 보여주는데 선진국은 복지예산이 경제예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한국은 정반대였다. 이러니 정부의 재분배 효과가 낮을 수밖에 없다. 송대희 원장은 경북중 다닐 때 우리 형하고 가까운 친구여서 매우 반가웠다. 그는 집이 가난해서 학비가 면제되는 서울 체신고로 진학했는데, 그 뒤 경제학자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쓴 자전적 기록에서 대통령 임기 중 중앙정부의 복지예산 비중을 20%(2002)에서 28%(2007)로 높였지만 “색연필 들고 쫙 그어버렸어야 하는데…”(‘진보의 미래’ 동녘, p. 234)라며 더 높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5년간 복지예산을 20%에서 28%로, 경제예산은 28%에서 20%로 각각 8% 포인트 변화시킨 건 거의 혁명적 변화다. 노 대통령이 재원배분 장관회의를 거쳐 예산 배정을 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 나는 이 회의에서 사회지출이 너무 낮으니 늘여야 하고, 그것이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41화 예산개혁 2 참조).

당시 보수 언론은 이런 예산 변화에 대해 분배·복지에 치중해 성장을 팽개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복지예산 28%는 과잉이 아니고 오히려 부족이다.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이 비율이 50%가 넘는 나라를 복지국가로 분류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50%가 넘고 심지어 ‘복지기피국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조차 50%가 넘는데 한국은 허구한 날 20%였으니 이게 정상적 나라인가. 이것은 박정희의 성장지상주의, ‘선성장후분배’ 경제철학의 유산이다. 한국의 보수집단은 지금도 여전히 성장만을 외치며 분배·복지를 퍼주기, 좌파로 매도하는 나쁜 버릇을 갖고 있다. 참여정부 말 28%에 도달한 복지예산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거치고도 33%에 머물고 있다. 이런 게걸음으로 언제 50%를 돌파해 복지국가에 도달할까. 제2, 제3의 노무현이 나와야 한다.

대통령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회복지 관련 정책 설명회가 2004년 12월23일 광주광역시 센트럴관광호텔에서 열려 김수현 청와대 비서실 차별사정비서관이 복지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청와대 정책실장과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이 위원회의 업적 중 아동빈곤 해결이 있다. 2004년 6월28일(월) 9시 수석회의에서 내가 ‘아동빈곤 종합대책’을 사전 보고했다. 김우식 비서실장이 ‘저소득 한부모 가정에 한해 월 2만원 지급’이란 구절에서 한부모가 무슨 뜻이냐, 한해 월 2만원은 이상한 말이 아니냐고 질문했다. 노 대통령이 “아, 나도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새로 보니 ‘한 해’가 아니고 ‘한하여’란 뜻입디다”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김우식 실장이 “그런데 한 달에 2만원이면 너무 적지 않습니까?” 하기에 “맞습니다. 10만원 정도로 올리면 좋겠는데 장애인, 노인들이 받는 돈이 월 3만~5만원이라서 형평상 우선 5만원으로 올리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이 “그래도 빈곤아동은 좀…” 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며칠 뒤 7월2일(금) 8시 출근길에 KBS 라디오에서 ‘빈곤아동 종합대책’을 소개하며 “참여정부다운 정책이 나왔다”고 평가했다.

2004년 12월29일(수) 10시 경제민생점검회의(세종실). 이헌재 부총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박병원 재경부 차관보가 새해 경제운용 계획을 보고했다. 있는 것 없는 것 몽땅 나열하는 식이어서 지루했지만 외부 인사들이 수준 높은 논평을 했다. 연세대 이혜경 교수(나중에 양극화민생대책위원장)가 복지전달체계가 잘 안 돼서 참여정부의 좋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체감을 못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창용 교수(현 한국은행 총재)가 국민연금에 대해 발언했다. 노 대통령이 화가 나 “복지전달체계는 전부터 중요하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되고 있느냐? 내년초 부처 업무보고 때 보고하라, 복지부, 행자부 어디 소관인가? 이런 나열식 보고를 언제까지 계속할거냐. 외부인사들 발언은 유익한데, 재경부 보고는 답답하다”고 몇 차례나 질책한 뒤 일어서려고 하기에 내가 얼른 한 마디했다. “복지전달체계는 복지부, 행자부 등 8개 부처와 관련된 문제라서 빈부격차위원회에서 1월말 국정과제 회의를 준비중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공무원들이 참 일을 잘 해요. 안 하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알아보면 다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박병원 차관보 아까 질책해서 미안해요. 장관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분위기가 급반전, 해피 엔딩이 됐다.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이 위원장 말 한마디에 공무원 전체가 칭찬 들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 뒤 복지전달체계 회의에서 턱없이 부족한 사회복지사를 당시 7200명에서 우선 9000명으로 증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해찬 총리가 공무원 증원에 반대해 문제가 발생했다. 2005년 2월18일(금) 내가 김수현 비서관과 함께 총리실을 방문했다. 김수현 비서관이 사회복지사 업무가 얼마나 과중하며 왜 증원이 필요한지 아주 조리있게 설명했다. 그 전에 총리실의 최경수 사회정책 수석조정관이 세 차례나 총리에게 복지사 증원을 건의했다. 최경수 건의, 김수현 보고 덕분에 이 총리는 선선히 증원에 동의했다. 이 총리는 이 문제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몇 가지 조언도 덧붙였다. 방치됐던 불우 이웃에게 이제 사회복지사의 도움의 손길이 뻗치겠구나 생각하니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다음 날 청와대 회의에서 만난 김근태 복지부 장관이 사회복지사 1800명 증원에 감사를 표시했다.

또 하나 중요한 업적이 근로장려세제(EITC: Earned Income Tax Credit)의 도입이다. 극빈층을 돕는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의욕 저해, 즉 일을 해서 돈을 벌수록 지원 액수가 줄어들고 심지어 지원 대상에서 탈락하는 위험이 생기는 모순(소위 ‘빈곤의 함정’)이 있다. 나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한겨레신문에 투고한 적도 있는데 그 뒤 찾아낸 대안이 근로장려세제였다. 이 제도는 저임금 노동자가 일을 많이 할수록 정부가 더 지원해주는 제도이니 기초생활보장제도와는 반대로 근로의욕을 고취하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인수위 때부터 이 제도 도입을 주장해 EITC연구팀이 꾸려졌다. 김태성 교수(서울대 사회복지학과)가 단장을 맡았고 경기대 박능후 교수(문재인 정부 복지부 장관)가 특히 많은 일을 했다. 그밖에 중앙대 김연명 교수(문재인 정부 사회수석), 김재진(조세연), 노대명(보사연), 석재은(보사연) 등 전문가들이 참여해 한국 실정에 맞는 안을 만들었다.

2005년 12월29일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 등촌 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아 사회복지공무원,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등과 간담회를 갖고 사회복지 전달체계의 현황 및 문제점 등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저도 직접 확인해보고 도와줄 것이 없는지 찾으러 왔다”며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고, 느낌을 가져보려고 왔다”며 이날 민생현장 방문의 취지를 설명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4년 11월10일(수) 10시 제54회 국정과제회의가 열렸다(세종실). 노동연구원의 황덕순 박사(문재인 정부 일자리수석)가 한국형 EITC 모델을 20분 만에 간명하게 보고하자 이목희 의원이 “오늘 발표 내용은 주제, 시기, 절차가 다 좋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이헌재 부총리는 인프라 부족, 예산 낭비 우려, 저임금 고착화 가능성, 좌파적 정책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자 유기철 교수(충북대)가 “영국, 미국에서 성공한 제도인데 좌파라니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노 대통령이 “EITC 합시다. 확실히 깃발 세우고 갑시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렇게 근로장려세제가 도입됐다. 다음 날 서울경제신문에 ‘EITC는 이정우 작품’이라는 보도가 났다. 지금도 이 제도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 어느 날 내가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근로장려세제 혜택을 입었다면서 좋은 제도라고 극찬했다. 내가 답했다. “그 제도는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했지만 실은 참여정부가 도입한 겁니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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