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원형이 궁금하다면… ‘안녕 해처드’ 하세요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서점이 등장한다. 이하늬가 열연한 <밤에 피는 꽃>에도 책방이 나왔다. 좌부승지 박윤학이 자주 들르는 곳인데 정확히 말해 세책점(貰冊店)이다. 인쇄본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필사본을 빌려주는 서점이다. 18세기 서울에서 사대부 계층의 여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인기를 끌었다. 18세기 사람인 이덕무가 “세책에 빠져 가산을 기울인 사람도 있다”고 폐해를 거론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책점은 오늘날 도서대여점에 해당하는데, 어릴 적 드나들던 만화방을 시작으로 무협지와 비디오 대여점을 거쳐 회원제 어린이책 대여점 등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존재했던 서점의 한 형태다.
대중 독자 탄생하며 도서대여점 생겨
조선시대 도서대여점은 왜 생겼을까. 싼값으로 책을 읽고 싶은 독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대중 독자의 탄생과 맞물린다. 이민희의 <18세기의 세책사>에는 도서대여업이 18세기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이었다고 말한다. 근대가 탄생하던 시기란 뜻이다. 영국에서 1815년 세 권짜리 소설 한 권의 가격은 오늘날 100달러 이상이었다. 지금도 이 돈을 주고 책을 살 수 있는 독자는 별로 없다. 책값이 비싸니 회원제 구독도서관과 상업적 대출도서관이 생겨났다.
오늘날 도서관을 뜻하는 ‘라이브러리’는 어원적으로도 ‘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도서관은 라이브러리 중에 가장 늦게 생겨났다. 영국은 1850년 공공도서관법이 통과됐지만 보편화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은 2000년 이후에야 작은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설립이 활발해졌다.
회원제 구독도서관이란 일정 자격을 갖춘 지식인이 회원으로 가입해 입회비와 연회비를 내고 전문서적을 빌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상업적 대출도서관은 서적상이 이익을 목적으로 연간 이용료를 받는 대신 고객에 제한을 두지 않고 책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대출도서관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무디(Mudie’s Select Library·1842~1937)였다. 무려 100년 가까이 성행했고, 특히 19세기 소설의 전성기를 주도하다시피 했다. 무디 대출도서관은 파격적으로 낮은 대여료와 엄선한 책을 갖춘 거로 유명했다. 무디는 빅토리아시대의 윤리관에 맞는 책을 엄선할 뿐 아니라, 표지에 페가수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돋친 천마) 문양의 심벌을 넣어 믿고 읽을 수 있는 무디의 책임을 알렸다. 소설 말고도 다양한 책을 구비했고 카탈로그도 발행했다. 무디를 비롯한 여러 대출도서관끼리 경쟁이 치열했는데 작가와 출판업자 그리고 서적 유통업자를 성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대출도서관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1814년 제인 오스틴은 <맨스필드 공원> 2판을 준비하며 “사람들은 구매하기보다는 빌려 읽고 칭찬할 준비가 돼 있다”고 썼다.
18~19세기가 되면 영국은 책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다. 예컨대 1708년 런던에는 이미 작가와 정치적 후원자가 모이던 커피하우스가 3천 개 이상 있었다고 한다. 이때 현대적 의미의 독자는 물론이고 근대적 서점의 모습도 탄생했다.
대출도서관으로 시작한 해처드
‘안녕, 유럽 서점’ 연재를 통해 포일스나 피앤지웰스(P&G Wells)처럼 오래된 영국의 서점을 살폈고,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앤컴퍼니처럼 고전의 산실이 된 서점도 만났다. 꼭 서점 탐방을 나서지 않더라도 여행자가 한번쯤 들르면 좋을 서점은 어딜까. 런던에 간다면, 돈트북스와 해처드(Hatchards)일 테다. 해처드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데다 바로 옆에 식료품과 차로 유명한 포트넘앤메이슨이 있다. 서점 방문과 쇼핑을 겸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물론 포트넘앤메이슨을 찾는 단체관광객 때문에 번잡함은 각오해야 한다.
해처드는 오래전부터 왕실 서점으로 이름이 높았다. 타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인 필립공 그리고 황세자 시절부터 찰스 왕이 해처드의 고객이었고, 서점 1층에는 세 개의 왕실인증서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또 역사가 깊은 곳이라 오스카 와일드 등 해처드를 즐겨 찾은 유명인과 얽힌 이야깃거리도 많다. 서점 곳곳에 옛 사진을 두고 적극적으로 전통을 홍보하고 있다.
서점의 1층 계단을 반쯤 오르면 창업자인 존 해처드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존 해처드는 1797년 서점을 창업해, 1801년 지금 위치인 피커딜리 187번지로 옮겼다. 원래 그는 커피하우스를 수년간 운영하다가 해처드를 시작했다. 처음 해처드는 출판은 물론 열람실을 갖춘 상업적 대출도서관을 겸한 서점이었다. 당시에는 출판과 서점 그리고 대출도서관을 겸한 방식이 가장 수익이 높았다. 지금도 해처드는 전통을 이어받아 고급 양장본을 한정판으로 출간한다.
오늘날 만나는 동네책방 역시 책만 파는 곳은 많지 않다. 음료는 기본이고 굿즈도 팔고 베이커리를 겸한 곳도 있다. 테이블이 있어 카페 기능도 한다. 독자는 서점에서 책을 사지만 사람을 만나고 모임을 하고 퇴근길에 들러 책을 보며 여유를 즐긴다. 이런 다양한 서점의 역할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거슬러 오르면 18세기 서점에 이른다. 해처드에 열람실이 있었다는 건 독자가 책을 읽으며 서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서점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후 출판과 서점 그리고 대출도서관을 겸했던 18세기의 서점은 점차 전문화의 길을 걷는다.
유럽의 오래된 서점에는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여기지만 과거의 서점이 결국 지금의 서점을 만든 기반이다. 디지털 변혁기에 다다른 지금, 미래의 서점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할 때가 있다. 확실한 건, 오늘 우리가 만들어가는 서점 문화가 미래의 서점을 만든다는 사실뿐이다.
글·사진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안녕, 유럽 서점’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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